Triumph Rise above the - Generation

77HO agami D KUM
상려 에카 이블 치 크레용

본 페이지는 반다이 남코 온라인이 서비스 중인 모바일 게임 "아이돌리쉬 세븐"의 등장인물인 TRIGGER의 기념일 합작 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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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9. 18.
yes, we'll go ahead.

크레용

 

 

@crayon0321

 

@CHI8910

이블

 

 

@evil_05_trigger

77HO

 

@kkang_i7

KUM

 

@kum_0324

에카

과거의 길

 

 

아네사기는 큰 테이블에 앉아 사람들과 '5주년 기획' 이 대문짝하게 박힌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가끔씩 물을 입에 대고, '셋 사이의 기억에 남는 상황이 있을까', '아이돌로서 가장 벅찼던 순간은?' 따위의 주어질 질문을 검수해가며 매니저의 일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항상 해왔던 것이기에 질문을 건져내는 작업은 순조로웠다. 프로 아이돌의 특성상 거의 모든 질문에 ok 사인을 내주었음에도, 아네사기는 신중하게 그 모든 대답을 미리 생각하고 허락해주는 것이었다. 절대 대충의, 안일한 생각 따위는 가지지 않고.

"아이돌이 어떻게 되었냐는 질문은 괜찮나요?"

종이를 넘기던 아네사기의 깔끔한 손이 잠시 멈추었다. 아이돌이 어떻게 되었다라. 그 아이들은 어떤 질문을 받던 잘 대답하겠지만, 그 질문을 솔직하게 대답하는 건 무리겠지. 느릿하고도 긴 침묵의 고민 끝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무리일 것 같아요, 라고 웃음지으며. 그렇나요, 짧게 대답하고 다시 토론을 시작하는 제작진들 사이에서, 그 질문은 오래토록 그녀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결국 모든 리허설이 끝나고 나와 밴에 탄 그녀는, 래빗챗을 켜 3명에게 질문을 보냈다.

- 너희는 아이돌이 된 이유가 뭐니? 

물론 이것은 아네사기가 전부 알고 있는 질문이기도, 모르고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대충의 사정은 알고 있다. 아버지가 야오토메 사무소의 사장인 가쿠. 타카마사의 아들로서 천 명 중 한 명의 천재인 텐. 아버지의 빚을 갚으러 오키나와에서 올라온 류. 그렇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개인적인 마음과 심정을 아네사기는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야, 본인이 아니니까. 그러니 진지하게 그들에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도 있겠지만 이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소원하며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 

아이돌이 된 이유라. 가쿠의 눈길은 한동안 핸드폰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라 할 건 없다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가 멋대로 자신을 아이돌로 만들어 놓은 것. 돈을 위해서 사람들 몇 따위는 쉽게 장기말로 쓰고 버릴 수 있던 제 아버지가 (지금은 조금 호감을 품었다지만)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을 아이돌로 교육시킨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에 대해 반발심을 품었었지. 아이돌 따위는 안 한다고 몇번이고 대들었지만, 결국 이렇게 TRIGGER의 리더로서 서 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아직까지 아이돌을 하고 있었는지 신기하네.

  하지만 후회라던가, 미련은 존재하지 않았다. TRIGGER를 그만두겠어! 라며 뛰쳐나가려던 손이 제지당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망할 꼬맹이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잘도 잡아주는 류를 생각하며 가쿠는 마시던 커피를 다시금 들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달콤한 맛이 유난히도 기분이 좋아서일까, 혹은 제 동료를 이제 놓을 수 없이 소중히 여기고 있어서일까. 가쿠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

지잉 울리는 진동에 책장을 넘기던 텐의 손이 멈추었다. 채팅을 확인하고는 이내 다시 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들어간다. 아이돌. 어쩌면 소중한 동생인 리쿠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했다. 처음에 떠올린 것은 리쿠의 웃음. 다음으로 너는 천재라는 타카마사의 말. 그리고... 자신의 공연에 열광하는 팬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이돌은 할 수 없었겠지. 환경은 텐에게 중요했으며, 그 환경과 일어난 사건들이 그를 아이돌로 떠민 것이었다.

그렇기에 텐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정하지 못하였다. 이유라.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탓이었다. 어떤 시점을 정하여도 그것이 이유였다. 리쿠의 웃음이 좋아 아이돌이 되었고, 자신을 제로로 키우겠다는 쿠죠 씨에게 약해져 아이돌이 되었다. 팬들의 소리가 좋아 아이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러하여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퍽 어려웠다.

그저, 결론은 이들이 소중하고 TRIGGER가 소중했다. 생각의 답은 그러할 뿐이었다. 그래서 텐은 우선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듣고 싶었다.  

:

류의 머릿속에 가장 처음 아른거리는 것은 사랑스러운 동생들이었다. 이유라고 한들 동생을 먹여살리고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아이돌이 되었지. 소속사의 방침에 따라 사투리를 줄이고 속칭 '에로에로 비스트' 의 이미지로 여러 광고를 찍고, 쉽사리 분쟁을 일으키는 가쿠와 류 사이에서 입버릇처럼 둘 다 그만하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돈을 벌려고. 하지만, 그 많은 일들을 지나고 서 있는 츠나시 류노스케는 생각했다.

어떤 것이던 이유보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각자의 이유를 딛고 TRIGGER의 일원으로서 만난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겠지. 류는 아직도 처음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백발의 청년을 처음 마주했던 겨울,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발걸음. 지나가면서 나누었던 시시콜콜하면서도 여린 감정들. 진정의 말을 표준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고민했던 자신.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미숙함이 추억이었던 것을. 다시 알림음이 울리면, 추억을 더듬던 눈길은 다시 핸드폰을 향했다. 

:

-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 맞아, 궁금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 추억을 되새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말이야~.

정말 메세지도 자기들같이 쓴다니까. 몰려오듯 빠르게 울리는 메세지 알림을 들으며, 아네사기는 단 한문장을 적어내려갔다. 

-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미래의 이정표가 된다잖니.

어떤 세월을 지내왔던 미래를 위해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아주 예전부터 받아들여진 일종의 진리였다. 고사성어나 속담 따위에서도 과거를 경계해서 현재를 고치되, 너무 과거에 맴돌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성일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원래 모두는 바쁜 일정을 보냈다가, 겨우내 9월 18일의 저녁 일정을 비워내고 세명이 처음 만났던 바에서 다과를 먹으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게 TRIGGER의 소소한 기념일 축하였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한동안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니고 일정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사방팔방 뛰어다니다 보니, 18일 당일의 일정과 또한 19일마저 널널하게 빈 것이다. 다행인 것이라면 17일에는 우연찮은 기회로 TRIGGER의 5주년 기념 방송을 하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와 촬영을 하게 되었고,  20일도 다른 라이브 일정이 잡힌 것일까. 그러니까 이 공백은 일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전혀 신경 쓸 것은 아닌, 다시 말해 과거를 돌아볼 기회였다. 년도가 달라져 다시금 왕좌에 앉는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다시 고민해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스케줄을 관리하는 아네사기는 특히나 잘 알고 있었다.

뭐, 이 모든 일도 회의에서 받은 질문이 없었다면 생각도 못하고 넘어갈 이야기였지만. 

자신의 래빗챗 한문장으로 한창 토론이 열린 단체 방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아네사기가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야오토메 사무소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빠르게 사원증을 찍고 엘리베이터를 올라가 자료실에 도착한 그녀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사무소의 사장실. 노크와 함께 갑자기 들이닥친 아네사기가 사장실 한켠에 꽂아둔 TRIGGER DVD를 집어드는 걸 보고 사장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라니... 그건 왜 가져가나?"
"쓸 데가 있어서요. 잠시만 빌릴게요, 사장님?"

찡긋 윙크를 하는 그녀를 소스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참 바라볼 뿐이었다. 



::: ::: :::



"자! 너희들의 타임머신을 위해 가져왔어."

아네사기의 손길 하에, 차곡차곡하게 쌓이는 DVD를 보며 세 명은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그 방대한 양이 5년동안의 길을 나타내고 있었다. 첫 데뷔 앨범부터, 아주 최근의 'Treasure!' 무대 DVD까지.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무대. 라이브 투어로 시작하여 뮤지컬 'Last Dimension'... 이런 것도 나왔었나, 일에 바빠 소홀해진 그때의 시간에 대한 추억이 탁자에 정갈하니 쌓여 있었다. 흥미에 가득 찬 손들이 플라스틱 케이스를 손에 훑다가, 뒷면도 읽어 보았다가, 그 안의 CD를 꺼내 살피기도 했다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사무소에서 지원을 받았을 때에는, 우리의 결정권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지. 그저 카메라 앞에서 한 무대를 끝내고 나면 어느새 발매 기사로 접한 우리의 앨범과 DVD들. 실제품을 받아도 살펴볼 시간은 없이 바쁜 세월을 보냈기에 오히려 우리의 무대를 보는 일은 적었다고 할 수 있겠다. 회색이, 분홍색의, 금색의 눈이 추억에 젖어들면, 아네사기가 다시 헛기침을 한다.

"이번엔 내가 주는 통큰 휴가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즐기렴! 이 바, 하루 종일로 대관했으니까."

세 아이들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라진다. 더듬더듬 어디 둘 줄 모르는 시선을 움직이다 아네사기를 복잡하게 바라본다. 시선에는 마치,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라는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기에. 그녀는 제 검지손가락을 들어 마치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말을 이었다.

"돈 걱정은 괜찮으니 일단은 즐기자. 정말 괜찮으니까."  

구석진 지하의 바라고 할지언정 하루 종일 대관하는 것은 분명 적지는 않은 돈이 들었을 것이었다 . 특히 예전보다 지원받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런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세 명 모두 그걸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낼 정도로 긍정적이지는 못했다. 그 눈이 마주치고, 곤란한 얼굴. 으쓱이는 그런 행동들이 아네사기가 이내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면 딱 멈춘다. 마치 그 동그란 눈으로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것이 꼭 세 마리의 고양이를 닮아서, 츄르라도 먹이면 귀엽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버튼을 조금 조작하자면.

♬ You and I 우리를 가로막는...

각인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TV에 비추어지는 것은 총 한 자루. 함께 들려오는 것은 어린 시절 그들의 목소리. 프로성은 지금보다 훨씬 옅으면서도, 벅찬 긴장감과 성숙되지 못한 야생미가 담긴 목소리가 울리자면 과거를 보는 현재의 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거를 마주하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저 속의 자신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5년이나 지났으므로. 비록 지금과 키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만 시선에는 갓된 긍지가, 얼굴에는 어린 티가 묻어나는 제복을 입은 아이돌들.

"텐, 저 때는 귀여웠지."

가쿠가 놀리듯 한마디 내뱉고서야 어색한 침묵은 깨진다. 미간을 좁히며 텐이 특유의 그 까칠한 목소리로 받아치면, 류는 언제나처럼의 특유의 웃음을 보인다. 

"아이 취급하지 마."
" 좋게 말해줘도 뭐라 그러냐. 까칠한 건 참."
"오늘같은 날까지... 자, 자. 다들 그만해. 뭐 마실래?"
"나는 항상 하이볼."
"아, 나는 사과 주스."
"텐은 항상 사과 주스를 고집하네. 이제 미성년자가 아니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나는 어디 사는 두명처럼 술 마시고 나동그라지고 싶지는 않거든."
"뭐, 이 망할 꼬맹이가...!" 

: : 

느긋하게 비워지는 유리잔과 함께 시간은 하릴없이 지나간다. 한 데 앉아 시작한 추억여행은 점점 그 공간을 늘려갔다. 처음 만나 화해 겸 춤을 추었던 무대에서 다시 흥에 빠지기도 했고, 셰이커를 흔드는 류 앞에서 과자를 집어 먹기도, 가져온 카드게임을 잠깐 즐기기도. 하나를 다 보면 조금 쉬다 다른 걸 트는 시간이 반복되는 작은 여행이 끝난 것은 5주년 기념 녹화 방송이 끝나기 1시간 즈음 전이었다. 어쩌면 빈둥하게 놀며 상영회를 보내는 것이 휴가를 보내는 방법임을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오히려 이런 소소한 일상이 좋았다.

"내일은 놀이공원이라도 갈까."

텐이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히 말을 꺼낸 건 마침내 TV 소리가 끊겼을 때였다. 

"좋아. 셋이서 놀이공원이라니 친목여행 같네!"
"그것보다, 오랜만에 퍼레이드가 보고 싶어. 오프 날에는 주로 퍼레이드를 보러 갔으니까."
"...혼자 갔었던 거냐? 뭐, 이왕 즐기는 김에. 놀이공원 소바는 무슨 맛이 나려나."
"아네사기 씨도, 함께 가면 좋을 텐데."



아이돌들에게 주어졌던 휴가를 매니저가 같이 즐길 수는 없듯이, 다만 아네사기는 꽤나 바빴다. TRIGGER의 담당 매니저라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모든 일정을 잡는 것은 그녀였기에. 5주년 방송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야 그녀는 바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여유 시간이 주어진다면 저녁 식사를 다른 그룹의 매니저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정도였을까. 젓가락으로 밥을 집어먹다시피 하며 그녀는 잠자코 다른 매니저들의 일에 관련된 말을 경청하고, 츠무기와 화장품 대화를 나누는 등 시시콜콜하게 배를 채우고 자리에 일어나려 하니 건네어지는 검정색의 종이 가방이 하나 있었다.

"오늘 TRIGGER의 5주년이죠? 다들 걱정과 응원을 담아 준비했으니 받아 주세요."

 떠밀리듯 쥐여진 갑작스러운 선물이라고 한 들 호의상 거절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네사기는 기꺼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방을 받아들었다. 가벼워서 아무것도 없나, 생각할 만도 하였지만 조금 힘을 주어 흔드니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무언가 안에 있는 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거기에 당장 뭐가 있는지 속을 들여다 보자니, 매니저 동료들에게 제지당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안되고, 다 함께 있을 때 꺼내 주세요!"

결국 그 안에 있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떠안은 채, 아네사기는 다시 바로 돌아가야만 했다.

딸랑, 느닷없는 검은색 종이 가방을 들고 돌아온 그녀에게 다시 시선이 쏠린다. 이번엔 또 무엇일까. 나직한 기대감이 담긴 질문이 들린다. 그건 또 뭔가요? 아니, 대답하지 마 매니저. 우리가 추리할 테니까. 폭죽? 케이크? 케이크라기엔 종이 가방이잖아... 나도 궁금하네! 아네사기가 그렇게 말하며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이건 내가 준비한 게 아니라, 다른 그룹의 멤버들이 애써 준비한 거야. 얼마나 먼저 열어보지 말라고 하는지 내가 다 궁금할 지경이네."

"그럼 지금 열어보면 되는 거잖아."

행동파라고 해야 할지, 독단적이라고 해야 할지. 말릴 새도 없이 가쿠가 종이백을 들었다. 가볍다는 말과 함께 뒤집어 대리석 테이블에 탈탈 털어낸다. 깨질 만한 게 들어있으면 어떡하냐는, 텐의 핀잔에도 떨어지는 것은 둘둘 말려 고무줄로 마감된 4장의 두꺼운 종이 묶음이었다. 

종이 묶음? 웬 것이지, 포스터일까? 류가 하나를 들어 고무줄을 벗겨내고 펼치니 이내 서서히 표정이 놀람과 행복으로 물든다. 가득 찬 기쁨의 감정에 다른 사람들이 뭐가 있는지 의문점을 품을 때 쯤, 그걸 뒤집어 보이며 류가 배시시 웃었다.

"이거 봐, Re:vale 선배님들의 축하 메세지야!"

A4의 두꺼운 종이에 분홍색의 복숭아 포스트잇으로 가득 차다시피 한 종이에는 대문짝만한 동글동글한 글씨로 'TRIGGER 5주년 축하!!!' 라고 쓰인 것이 선배인 리바레의 멤버 모모의 글씨체라는 것을 누구든 알 수 있었으리라. 두꺼운 펜으로 가득하게 쓰인, 대충만 훑어봐도 알 수 있는 축복과 후배를 향한 애정이 얼마나 쓸 말이 많았던 건지. 한 켠에 작게 쓰인 날카롭고 얇은 펜으로 쓰인 다른 글씨도 있는 것을 보아 이것은 유키의 글씨체겠지. 모모의 편지가 얼마나 길었는지, 유키가 먼저 쓰고 그 나머지 공백을 모모가 잔뜩 채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호오, 짧은 흥미를 내보이며 텐이 다른 것을 열어보니 그것은 Idolish7의 롤링페이퍼. 다같이 꾸민 듯 한쪽에는 오오사마 푸딩, 구석에는 롯푸쨩이 그려진 무지개빛 글자의 하모니를 훑어내려가던 눈길이 유독히도 붉은 글씨에 멈춘다. 동글동글한 글씨에는 추억이 담겨 있었다. 가득 차 있는 축하의 말들. 이것을 썼던 그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리 생각하고 펜이 적힌 종이를 손길로 훑어서야 다른 멤버들이 볼 수 있게 내려놓고 읽는 것이었다. 

질 수 없다는 듯 가쿠가 다른 것을 내리 들어 읽어내리면 그것은 매니저들의 축하의 말. 3명의 축하 인사가 유난히도 가지런했다. 오오가미 반리의, 오카자키 린토의, 그리고 타카나시 츠무기의... 정갈하게 쓰인 그 축하 인사를 읽어가는 가쿠는 자신의 눈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저도 모르게 품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잦아들고 나서야, 아네사기에게 이건 매니저가 먼저 읽어야 할 것 같다며 내밀고서 다른 종이를 펼쳤고 이내 적잖이 놀랐다.

"어라."
"왜 그래?"
"ŹOOĻ의 메세지야."

테이블의 펼쳐진 종이에 쓰인 것은 네 방면으로 나누어진 작은 편지들. 맺어진 관계가 관계인 만큼, 이런 걸 받을 줄은 몰랐는데. 가쿠가 옅게 웃으며 눈으로 그 편지들을 읽는 것에 이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그 쪽에 쏠린다. 쓰는 데에 많이 고민했던 것인지 두 줄로 쫙쫙 그은 오탈자가 눈에 띄였다. 이어 읽어내려가면 거기에 쓰인 것은 솔직한 사과와 진심이 담긴 축하 인사. 그런 사과임에도 그 누구도 용서해줄까, 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고, 푸슬 미소를 띄었을 뿐이었다. 어떤 그릇된 감정이 담기지 않는, 축하받는 자들의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 속에 적힌 것을 쭈욱, 전부 읽는 것을 끝내자면 벌써 기념 방송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익숙하게 리모컨을 집어든 아네사기는 TV를 키는 대신 가쿠에게, 텐에게, 류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 입을 벌렸지만 나오는 것은 얼마 없었다. 따지자면 아버지가 떠밀은 편이었지. 빚을 갚기 위해 스카우트 되었어. 무거워지지 않는 시시콜콜한 말이 오가고, 한 명은 침묵을 유지하는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분명 할 말을 고르지 못하는 탓이었으리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무리라는 것은 질문을 한 아네사기마저 알고 있었던 것이니. 그렇기에 아네사기는 호통치는 대신 그저 미소짓고 말했다.

"너희가 어떻게 아이돌이 되었던,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 너희는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잡아 아이돌로서 함께하고 있는 거니까. 그렇기에 과거도 좋지만, 과거에 너무 매달려 있으면 안 되잖니.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총알처럼 그것들을 꿰뚫는 게 너희들이니까."

애정. 필시, 애정이었을 것이었다. 서로를 애정하고 사랑하며, 우리 서로는 어쩌면 예전의 일에 대해 저도 모르게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는 마음을 저마다 껴안아 버리고서... 그렇지만 털고 일어나 지금은 상관없어, 라고 말하는 여유는 그들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진심어린 눈을 마주하고,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나서야 그들은 아네사기에게 대답했다. 

"우리는 TRIGGER니까."

기념일 축하해, 아네사기는 그리 웃고서야 TV를 켰다. 

 

 

@ll3___eka

D

 

 

야오토메 가쿠는 로맨티스트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건 소속사에서 치밀하게 셀링한 이미지 탓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촌스럽다고 느끼는 어떤 현상, 인물, 관념에 과할 정도로 반응하는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야오토메 가쿠는 본인을 로맨티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보다 낭만적인 것들에 불만이 많다.

 

패밀리어 familiar



간만에 찾아온 스케줄이 텅텅 빈 날이다. 거의 3개월 만이었다. 전날 밤, 함께 바쁘게 달려 주었던 카오루가 세 사람의 눈앞에서 핸드폰을 끄고, 내일은 아무 연락도 받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이 아네사기 카오루라는 위인은 1초도 안 되어 핸드폰을 다시 킬 것이다.) 텐은 ‘간만에 쉬는 날이니 연락하지 말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류노스케는 섭섭하게 그게 무슨 소리냐 했지만 간만의 휴식을 꽤 기대하는 눈빛이었고, 가쿠는….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몇 번이나 말해야 되는 거야?”
“좋은 아침이야, 가쿠!”
“하, 부른다고 바로바로 나오는 주제에 토 달긴.”

제 집으로 멤버들을 모았다. 쉬는 날 직장 동료의 호출은 유쾌하지 못한 상황임이 틀림없음에도 텐과 류노스케는 말과 달리 불쾌한 기색이 일절 없었다. 그게 참 특이하기에 가쿠는 웃는다. 난 친구 별로 없다고 쳐. 너넨 왜 친구들 안 만나고 날 고르는데. 꺼내봐야 무용無用한 말을 삼킨다. 대신 말보다 확실한 대접을 해 주기로 한다. 가쿠는 예전부터 그런 걸 좋아했다.
세 사람은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 전에 주전부리를 만들기로 한다. 간만에 가쿠가 주방에서 소매를 걷었다. 류노스케가 도와주겠다며 선뜻 나섰으나 제지당했다. 가쿠가 만든 건 맛이 없을 거 같다며 배달을 찾아보겠다는 텐도 제지당했다. 가쿠가 고집을 부리면 도통 당해낼 수가 없다. 그는 고집을 리더십으로 곧잘 치환하지만, 지금은 그냥 생떼였다. 두 사람은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먼지를 쏙 빼내기라도 했는지 푹신하고 포근한 것이 기분 좋았다.
가쿠가 선택한 메뉴는 감바스였다. 손이 많이 가지 않아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대접하는 티는 난다.

 


잘 씻어낸 탱글탱글한 새우 위에 허브솔트를 톡톡 뿌린다. 끝을 잘 다듬어 놓은 통마늘을 넣고 기름에 둘러 끓인다. 고소한 냄새가 나자 류노스케가 슬금슬금 부엌으로 넘어왔다. 어린 애도 아니고 뭐야. 텐은 부엌으로 시선만 넘겼다. 그래도 코는 조금씩 벌렁벌렁, 움직인다. 그럼 가쿠와 류노스케는 텐을 보며 속닥거린다. 어린 애는 역시 어린 애라니까. - 텐 앞에서는 절대 못 하는 소리다.
영화의 장르는 로맨스였다. 줄거리가 길게 쓰여 있지 않았다. 처음 보는 감독 이름이었다. 가쿠가 고른 영화는 아니었다. 텐은 영화의 제목을 가만히 보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아.” 짧은 탄성을 냈다. 저번 주 쯤 출연했던 라디오에서 받았던 사연 속의 영화였다. 텐은 사연을 읽던 진행자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회상한다.


[팬 네임, ‘불타올라 가쿠’.]
분명히 가쿠랑 잘 어울리는 수식어건만 왠지 우스운 어감이라 진행자와 다 같이 웃었다.
[OOO라는 영화 보셨어요? 이게요, 엄청 재밌는 영화는 아니지만, 사이좋은 TRIGGER를 볼 때마다 느꼈던 것처럼 편해요. 꼭 내 집 같은….]


어느새 부엌에서 돌아온 류노스케가 DVD 플레이어에 CD를 집어넣었다. 류노스케는 플레이어 앞에 앉아 CD가 삼켜지는 걸 계속 보고 있었다.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가쿠가 가지고 있는 기계는 조금 오래 된 기기였다. 나올 당시에는 고성능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것. CD 읽는 소리가 꽤 크게 난다. 왜애앵. “요즘 기기들은 CD 읽는 소리도 잘 안 난대.” 류노스케가 중얼거렸다. 잠시 후 소리가 뚝 끊긴다. 이내 처음 CD를 읽을 때보다는 작은 소리가 난다. 가쿠가 그의 말을 받아쳤다. “이 정도 소음이면 안 거슬리니까 괜찮아.” 류노스케는 웃으며 긍정했다.
화면이 켜졌다.


[오래 된 사람들의 인연은 다 그렇잖아요. 나에게도 이런 인연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흐뭇한 기분으로 보게 되잖아요. 이유 없는 동질감? TRIGGER를 볼 때도 그래요.]
[저에게 TRIGGER만큼 근사한 동료들은 없지만, 보고 있으면 그냥 좋아요. …… 그래서 영화가, 조금 지루할 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생각나면 봐 주세요! 아마 보시면 무슨 느낌인지 아실 거예요. 아, 아까는 조금 건방졌을까요…… 하지만 늘 응원해요. 감사합니다.]


불타오른다는 이름에 비해 사뭇 담담하고 차분한 이야기였다. 텐은 팬레터의 내용을 떠올리며 엷게 미소지었다. 가쿠가 무슨 좋은 생각을 하냐고 물었지만 텐은 대답하지 않았다. 텐은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을 보지 못했다.

 


영화를 추천하면서 겁을 주는 사람들의 말은 신뢰하는 게 좋다. 역시나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가쿠는 두어 번 졸았고, 류노스케는 중간중간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탓에 새우를 먹다가 허벅지 위로 툭 떨궈버리기도 했다. 텐은 꽤 오랫동안 집중했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확실히 분위기는 좋았지만, 재밌지는 않았어.” 그럼 간신히 잠에서 깨어난 가쿠가 퍽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긍정한다.
소꿉친구에서 시작해서 결혼까지. 지루한 플롯. 잔잔한 시골 마을. 지루한 배경.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여자 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헌신하는 남자 주인공. 사랑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인생의 전부가 사랑이어도 된다고 말하는 낭만적인 여자 주인공.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연인. 작은 오해도 사랑으로 풀어 나가는 두 사람. 특별한 방해 없이 그들을 응원하는 세상. 조금 얄궂은 친구들은 있지만, 그들도 결국 둘의 사랑을 응원하고 두 사람을 사랑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사랑으로 꽉 차 있는 이야기였다. 지극한 이상향이었고 지극히 작위적이었다.
화려한 테크닉이 있으면 지루한 일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과장하고, 부풀리고,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일으키고 어떻게든 수습만 잘 시키면 된다. 근데 이 감독은 참 요령이 없다. 아름답고 지루한 이상향을 카메라에 따분하게 담아낸다. 마지막 장면이 페이드 아웃 될 때, 류노스케가 말했다. 엄청 낭만적이다. 좋은 뉘앙스는 아니었다.


가쿠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감독의 이름을 보지 않았다.

 

 


극진한 낭만가가 아닌 가쿠는, 생각보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 생각보다 보이지 않는 가치는 가쿠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가쿠는 사랑을 사랑하지만 말과 행동으로 하는 애정을 더 사랑한다. 태생이 그렇다. 답답한 건 질색이고, 답은 A가 아니면 B였다.
‘시원시원하다’와 ‘화끈하다’는 맥락이 통한다. 가쿠는 그런 사람이다. 사랑을 따뜻하게 바라보나 시원스러운 표현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말하지 않고 소중히 품속에 지니고만 있는 사랑에 불만이 많았다. 대신 무대에 쏟아지는 조명과 팬들의 함성과 귀를 터뜨리는 음악 소리와 열기에 가득 차 저를 꽉 껴안는 동료들을 불만 없이 사랑했다.
영화의 내용을 가만히 곱씹던 가쿠는, 잘 가꿔진 정원으로 저들을 떠올리고, 본인도 지루하게 본 영화를 굳이 꺼내어 전한 팬의 마음을 한 번 어림잡아 보았다. [보시면 무슨 느낌인지 아실 거예요.] 진행자는 딱딱하게 인쇄된 글자를 꽤 생동감 있게 읽었다.
그래서 가쿠는 문득 이런 소리를 하게 된다. “결론을 냈으면 좋겠어.” 맥락 없이 튀어나온 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기울인다.
“우리야 영화보다 좀 더 다사다난하긴 했지만… 어쨌든 비슷하고 편안한 느낌이라며. 근데 우리는….” “애인, 은 이 때 쓰는 말이 아니고. 가족, 이라는 말도 왠지 부족하고. 동료는 너무 부족하고….”
“가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가족보다 더 좋은 거 없나? 이상적인 관계 말야.”



자리를 정리했다. 흐르는 물에 그릇을 씻고 건조기를 돌렸다. 탁자를 닦고 자세를 바꾸느라 어지럽혀졌던 담요나 방석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동안 세 사람은 같은 논제를 생각했다. ‘가족보다 더 좋은 것’.
류노스케가 잠시 집에 다녀온다 하더니 꽤 좋아 보이는 술을 가져왔다. 왠지 술이 필요한 얘기인 거 같다며 너스레를 떠는데, 가쿠는 그게 류노스케의 배려임을 알았다. 물론 그냥 술을 마시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병을 따는 소리부터 명쾌하더니, 한 잔을 따라 보고 좋은 술임을 깊이 체감했다. 애주가의 선택 역시 신뢰하는 게 좋다. 첫 잔을 나누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했다. 아까 보았던 영화 얘기를 시작으로 낭만을 이야기했다. 가장 불만이 많은 건 역시 가쿠였다.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말하고, 행동하고…… 갈등 같지도 않은 갈등이었지만, 그것도 말을 했으면 다 괜찮았을 거라고. 텐은 가쿠다운 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텐은 언젠가의 가쿠가 위험을 무릅쓰고 저들을 지키려 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가쿠와 같은 결론에 닿는다. 그래, 말을 했으면. 류노스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잔을 가만히 들고 있었다. 그러다 꽤 낯선 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가족보다 더 좋은 거라고 했지만…. 난 사실 가족이 ‘가장 좋은 거’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거 같아.” 멋쩍은 웃음이 흘렀다. 그런가. 가쿠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음… 사랑하는 거랑 별개로. 그냥…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있는… 너무 당연한 존재니까. 당연하다고 소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류노스케의 말이 길어진다. 텐은 말을 잘라내는 타이밍을 잘 알고 있다. 가만히 류노스케의 어깨를 두드리다가, 텐이 첨언한다.
“오히려 가쿠의 그런 생각이 폭력적이지.”
“….” 류노스케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커다란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고, 그저 순간 잠이 들었던 것 뿐이다. 제 잔을 마저 털어 넣은 텐이 말을 갈무리했다.
“우리 중에 가족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건 가쿠가 아닐까?”


“누가 그런 아버지를 좋아한다고 그래?”

 

 



곧 해가 저물었다. 세 사람은 삶과 가족과 직업을 이야기했다. 결속을 이야기했고, 사회적인 수단을 이야기했다. 다음 날 스케쥴도 저녁이겠다, 얘기에 제동이 걸릴 기세가 없다. 꾸벅꾸벅 졸던 류노스케도 일어나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니 오히려 과열됐다. 답지 않게 텐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던 얘기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여기저기로 튀기 시작했고……


“아, 그래, 그래. 그러면 나중에 결혼해 버리면 되잖아.”
“누구랑?”
“너네랑!”
“너는 그렇게까지 우리랑 법적으로 엮이고 싶어?”
“가, 가쿠. 난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


………이런 단계에까지 이르고 만다. 가쿠는 벌떡 일어나면서까지 발언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이 계속 그의 발언을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지만 핀 포인트를 맞추는 지적은 하나도 없었다. 이 밤의 안주는 말도 안 되는 재료를 섞어 대충 튀겨낸 담화였다. 법률, 사회적 합의, 통념…… 이성적인 상태에선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요소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우스워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자꾸 말로 내뱉었다. 결국 가쿠가 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뭘 갖다 대도 표현이 안 되잖아!” “이런 건 답답하다고…!”
근원은 결국 야오토메 가쿠의 천성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을 시원스레 표현할 단어의 부재. 그게 야오토메 가쿠를 건드린다.

 

 



“그래도, 가쿠. 생각해봐. 그룹이라는 말도 되게 괜찮지 않아? 친구든, 가족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거 같고….”
“같은 그룹이란 억지로 붙은 이름이지만, 같은 그룹인 우리가 친구라고 하면 다른 친구보다도 훨씬 애틋해 보이고, 가족이라고 하면 더욱 특별해 보이잖아….”
“그룹이라는 틀이 있기 때문에, 다른 명칭을 가져다 대도 더 사랑스러워져.”
류노스케는 퍽 자랑스러운 투로 쭉 이어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취기에 고개를 마구 저어대며 소리를 지르던 사람 같지 않았다. 조목조목 읊조린다. 가쿠는 신중하게 읊어 내려지는 류노스케의 진심을 새겨들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말로 들으면 이렇게 좋잖아. 가쿠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틀에 갇혔으나 그의 주변은 그가 가꾼 이상향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족이… 존재의 시작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거라고 생각했던 거라면, 그룹도 우리들의 시작이니까… 가장 좋은 거라고 생각해. 가쿠.”
이내 류노스케가 헤헤,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보기 좋고 듣기 좋은 웃음이었다. 가쿠는 화를 낸 게 민망한 듯 헛기침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텐이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면 지금 이대로도 좋네, 가쿠? 아니면 뭐, 남에게 설명하기 위한 호칭이 필요한 거야?”
문득 가쿠는 텐이 ‘설명할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 가쿠는 짧게 신음하다 말을 이었다.
“비슷한 거.”
“법적으로 보호받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척 들어도, 뭐야, 이 자식들, 엄청 친하잖아! 그런 소리가 나올 법한 죽여주는 호칭이 필요한 거였다고.”

 


다시 한 번 가쿠는 오후에 보았던 영화를 떠올린다.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가 그려내고자 했던 작위적인 풍경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연한 얘기다. 항상 갈등보다도 화합을 그리는 게 힘들다. 맑은 물을 더러운 물이라고 매도하기는 쉽지만, 혼탁한 물을 맑은 물이라고 설득하는 건 고난이다. 잘 짜이고 그럴싸해 보이는 필터를 수백 개 가져다 대더라도 사람들은 불순물이 떨어질 때까지 필터를 노려본다. 투명하게 내부를 공개하고, 불결한 것을 몇 개 떨군 후 컵에 채워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 물이 맑음을 믿는다.
완벽보다는 결벽에 가깝게 인간의 결합을 그린 지루함 속에서, 팬은 그들을 볼 때와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집과 같은 그리움, 안정. 터프한 제작 환경, 소속사의 내밀한 사정, 가증스럽게 형성된 대외적인 이미지, 비용, 현실의 온갖 불결한 것이 켜켜이 쌓인 표상에서 느끼기엔 어색한 감정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안온한 감정을 느꼈고, 세 사람에게 동조했으며, 사랑을 표현했다.
그룹, TRIGGER, 가족, 친구, 어떤 말도 맞지 않고 만족스럽지 않았다. 가쿠는 좀 더 확실한 말이 필요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사람이 반드시 ‘어떤 사람’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단어를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인류의 거대한 역사가 될 수 있다.
여기서 가쿠는 자신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기로 한다. 위대한 역사가 되고 역사의 단편을 뽑아내 단어로 만드는 걸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이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제 마음을 알아줄’ 두 보물에게도 말하지 않을, 야오토메 가쿠의 커다란 포부였다. 가쿠는 볼이 붉게 상기된 채, 한참 입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텐과 류노스케는 웃었다.

 


“가쿠는 참 그런 걸 좋아하더라.”
“가쿠는 어쩔 수 없는 낭만가라니까!”

 

 

 

@norgknolife

agami

 

 

허공에 완만한 포물선이 그려진다. 투명한 선이 부드럽게 능선을 넘듯 곡선 형태로 이어지더니, 이내 가쿠의 품에 쏙 떨어졌다. 농구였다면 3점 득점이 인정될 순간이었다. 가쿠는 두 손으로 겨우 잡은 것을 내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새하얀 조명에도 색이 바래지 않고 휘황찬란한 금색으로 빛나는,
“사과……?”
“그래도 그거 먹으면 안 돼.”
카오루가 팔짱을 끼며 충고하자 가쿠가 눈살을 찌푸리며 “안 먹어”라고 대꾸했다. 류노스케는 금색 사과가 신기한 듯 가쿠 근처로 다가가 빤히 바라보았다. 니스라도 칠했는지 투명한 광택이 도는 표면에 류노스케의 얼굴이 비쳤다. 다행히 인공적인 지독한 향은 나지 않았지만, 모양을 보아하니 진짜 사과에 금색 스프레이로 덧칠한 모양이었다. 가쿠와 류노스케가 사과를 꾹꾹 누르는 것을 못 본 척하며, 텐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먹을 건 안 받지 않나요?”
카오루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냄새를 맡으며 대답했다. 손에 스프레이 냄새나 반짝거리는 가루가 묻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그거 선물일 테니까.”
류노스케가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런 것 같네. 여기 봐봐.”
가쿠는 그가 가리킨 대로 손바닥 위에 사과를 얹고 네 사람에게 다 잘 보이도록 팔을 내밀었다. 마치 금색 물결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반짝반짝 오색 빛을 흩뿌리는 구체 한가운데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TRIGGER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

*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텐이었다.
고양이를 닮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가쿠를 빤히 바라보면서.
“왜 가쿠예요?”
류노스케는 옆에서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가쿠 잘생겼잖아?”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쿠는 생각이 다 폭로되는 류노스케의 표정이 부담스러운지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텐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 뒤에 숨은 장난기가 언제 밖으로 나올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카오루는 휴대폰을 확인하느라 그 점을 알아채지 못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안기고 싶은 남자 1위였잖니!”
그 말에 텐은 흐응, 허밍 같은 소리를 내며 가쿠를 돌아보았다. 하얀 피부와 곱상한 이목구비의 천사 같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짓궂은 표정이 얼굴을 가득 덮고 있었다.
“축하해, TRIGGER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오토메 가쿠 씨.”
“빈정거릴 줄 알았어.”
가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류노스케에게 사과를 건넸다.
“애초에 잘생긴 거로 따지면 류가 제일이잖아.”
엇나간 농구공처럼 허공에서 드리블을 몇 번 하고서야 류노스케의 손 안에 사과가 착, 안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마치 폭탄인 양 화들짝 놀라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당황스러워하더니,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그렇지만, 텐은, 천사인걸!”
천사인걸……, 천사인걸……, 천사인걸…….
천장이 그리 높지도 않은 거실에 류노스케의 울음 섞인 비명이 웅웅 메아리치며 울렸다. 카오루는 초당 10타씩 쓰던 손가락을 멈추었고, 가쿠는 웃는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이 일그러지는 표정을 겨우 붙잡았고, 텐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으나 차마 버티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민망함에 몸부림치는 입꼬리가 씰룩거려 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니, 괜찮아. 이건 류 것이 맞아.”
“그렇지 않아! 여기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걸. 텐이 아니라면 가쿠가 분명해!”
“그렇게 따지자면 나보다는 현대의 천사가 더 어울리잖아?”
“빈정거리는 거야, 안기고 싶은 남자 1위 님?”
“빈정거리는 건 너잖아!”
“그만해, 둘 다 나 때문에 싸우지 마!”
사과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두 손으로 꼭 쥔 채 류노스케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말을 맞춘 듯이 가쿠와 텐이 류노스케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높였다.
“류 때문이 아니잖아!”
가쿠는 하아, 한숨을 푹 내쉬고는 머리를 벅벅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류노스케의 손에 들려 있던 사과를 집어 텐에게 떠넘기듯 내밀었다.
“자, 네 거.”
그러자 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고는 가쿠를 쏘아보았다.
“네 거겠지?”
가시가 마구 박힌 말투 탓에 가쿠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까지 장난치고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던 분위기는 갑작스러운 빙하기의 도래로 종말을 맞이한 듯했다. 가쿠와 텐 사이에 알싸하고 시린 공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 안에 맹수의 것을 닮은 동공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류노스케는 이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이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울려주질 못하겠네.”
텐이 날 선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가쿠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텐…….”
류노스케가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텐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방으로 돌아갔다. 쾅! 일부러 세게 문을 닫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찔렀다.
“흥, 망할 자식.”
가쿠도 텐이 간 곳을 보고 으르렁거리더니 쿵쿵 발을 울리며 방으로 향했다.
“어울려주질 못하겠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냐!”
그렇게 쩌렁쩌렁 소리치고는 가쿠 역시 문을 부숴버릴 기세로 닫았다.
“……이걸 어떻게 하죠?”
류노스케가 구조 신호를 담은 눈빛을 쏘았지만, 카오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알아서 해!”라며 나가버렸다. 원래부터 멤버들의 사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텐과 가쿠의 다툼은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말리는 것이 귀찮은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늘 화해시키는 게 힘든데 말이지. 류노스케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거실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류노스케는 결국 다시 제 손으로 돌아온 사과를 내려다보았다. 빨간 색깔이었다면 분명 잘 익어 달고 맛있었을 테지만, 도저히 먹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 황금 사과는 먹을 수도 없었다. 불화의 여신이 던져 넣은 듯한 황금 사과는 제 존재를 과시하며 눈이 부시도록 빛나기만 할 뿐이었다.

*

“어라, 너희 아직도 그러고 있니?”
다음 날, 밴 뒷좌석에 류노스케를 사이에 두고 앉는 가쿠와 텐을 보며 카오루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일을 할 때에는 프로 의식으로 똘똘 뭉쳐서 곧 죽어도 팀워크를 깨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그만큼 고집도 세서 잘 물러나지 않았다. 힘든 시기에도 약한 소리를 하는 대신 위를 쳐다보며 견뎌온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이럴 때만큼은 다섯 살배기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다섯 살 꼬마라면 사탕이나 장난감으로 꾀면 말이라도 잘 들을 텐데.
“가쿠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니까.”
“텐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잖아.”
온몸으로 정전기를 발산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커다란 몸집이 무색하게도 맹수 사이의 가련한 햄스터처럼 오들오들 떠는 류노스케가 불쌍하게 느껴졌지만, 카오루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이들 싸움에 말려드는 건 성가시니 싫기도 했고 이런 일은 당사자끼리 결착을 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어차피 며칠 못 가겠지, 류가 제대로 둘을 화해 시켜 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카오루는 가볍게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러나 카오루는 반나절도 안 되어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촬영 전에도 셋이 예의 바르게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촬영 중에도 늘 그랬듯 TRIGGER답게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다. 짧은 MC 코너에서도 가쿠와 텐은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자연스러운 미소로 서로를 마주했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는 순간이었다. 돌연 가쿠와 텐의 얼굴에서도 빛이 꺼지며 서로 홱 얼굴을 돌리는 것이었다. 스태프 중 누군가가 “Re:vale 불화설에 이어 TRIGGER 불화설이 불거질 차례냐”면서 농담을 던져도, 그 누구도 익살스럽게 받아치지도 정색을 하며 부인하지도 않았다. 농담이 진담으로 퍼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가쿠와 텐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한랭 전선은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돌아가는 밴 안에서도 류노스케는 텐과 가쿠 사이에 끼어 땀을 뻘뻘 흘렸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따끔따끔한 침묵이 류노스케를 찔렀다. 답답한 공기가 불편해 견디다 못한 카오루가 한 마디 던졌다.
“너희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니?”
그러자 텐이 애교 하나 없이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목소리로 류노스케에게 말했다.
“류, 네 옆의 남자에게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물어봐 줄래?”
류노스케가 정말 물어봐야 할지 가쿠의 눈치를 보자, 가쿠도 팔짱을 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류, 그런 건 직접 물어보라고 네 옆의 망할 꼬마 녀석에게 말해줘!”
“류, 직접 말하기 싫다고 전해줄래?”
“류, 저 녀석이랑 얘기하는 건 이쪽도 사양이라고 해줘!”
굳이 전해주라고 하지 않아도 충분히 들릴 만큼 큰소리를 치고는, 눈이 마주치자 가쿠와 텐은 이상한 얼굴 만들기 대회라도 하는 듯 둘 다 한껏 얼굴에 주름을 잡았다. 카오루가 봤더라면 얼굴을 막 쓰지 말라며 주의를 받았을 법한 표정이었다. 류노스케는 바로 눈앞에서 그 얼굴을 보고는, 둘 다 사실 황금 사과를 받을 얼굴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아주 잠깐 진지하게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자 절찬리 싸움 중인 두 사람은 카오루에게 짤막하게 인사만 하고 들어갔다. 카오루는 마지막으로 들어가려는 류노스케를 붙잡아 불렀다.
“류, 내일은 오프니까 확실히 둘을 화해 시켜. 이렇게 유치한 싸움 때문에 눈치 봐야 하는 건 사양이야!”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류노스케는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둘이 저러는데…….”
“그러니까 강경책이라도 쓰라는 말이야. 너는 정말이지 겉보기랑 달리 마음이 심약해서 어쩜 좋니!”
강경책? 류노스케가 눈을 끔뻑끔뻑거리자 카오루가 비장의 수단을 꺼내듯 비장하게 말했다.
“불화설이 나돌아도 되느냐고 협박이라도 하란 말이지!”
확실히 이런 상태로 일을 이어간다면 불화설이 도는 건 시간문제였다. TRIGGER라는 네임 밸류에 찬란한 수식어를 붙여 좋은 이미지만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불화설이 불거진다면 큰 타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카오루는 류노스케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장 연장자니까 힘 좀 내주렴, 하고는 가버렸다.
류노스케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표류해 물 위에 망연히 둥둥 떠 있는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 속 불빛에 가려 별은 보이지 않았으나, 가장자리에는 바늘구멍이 뚫린 것처럼 하얗게 빛나는 점이 보였다. 그 이질적인 빛은 집 안에서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황금 사과와 비슷하게 보였다.

*

“텐,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다음 날, 방에서 나오지 않는 두 사람을 어떻게든 화해하게 하고자 류노스케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문을 두드리자 텐은 순순히 류노스케를 방에 들였다. “가쿠와 억지로 화해시킬 생각이라면 사양하겠어”라며 문전박대당하는 미래도 염두에 두었던 터라, 류노스케는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텐의 방으로 들어갔다.
텐은 류노스케에게 의자를 내주고 침대에 앉아 류노스케와 마주 보았다. 류노스케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그가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다 알고 있다고 추궁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제보다 독기는 빠진 느낌이었다. 텐도 하룻밤 사이에 혼자 많이 생각한 걸까, 류노스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텐, 내가 하려는 얘기가 뭔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가쿠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얘기지?”
텐의 무시무시한 기세는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가쿠에게 먼저 다가가는 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강경책이라도 쓰렴!
날카로운 카오루의 목소리가 아직도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류노스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수단은 고집이 하늘을 뚫은 유아독존 두 사람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
류노스케는 알고 있었다. 가쿠와 텐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가쿠와 텐은 이렇게 싸울 정도로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류노스케는 주먹을 꼭 쥐고 가슴을 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역시 억지로 화해시키고 싶진 않아!”
류노스케가 그렇게 말하자 텐이 의외라는 듯 류노스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텐이 가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
이번 다툼은 불화가 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텐은 가쿠를 좋아했다. 그의 실력은 물론 외모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기엔 부끄러워서 자존심으로 진심을 덮어버리려고 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그 점을 말로 꺼내면 텐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거라 류노스케는 생각했다. 텐은 류노스케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언가를 읽어내는 듯 한참 그렇게 있더니, 텐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류는…… 이래서 치사해.”
“어? 왜? 내가 뭔가 나쁜 말 했어?”
류노스케가 화들짝 놀라자 텐이 풋,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류를 보고 있으니 삐쳐 있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이번에는 나도 어른스럽지 못했어.”
그렇게 말을 이으며 가볍게 미소를 띠는 텐의 표정은 한결 상쾌해 보였다.
“나 말이지, 진심으로 황금 사과가 가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물론 류도 아름답지만, 류는 멋있는 편이잖아. 아무튼, 그런데 가쿠는 뭘 하든 담담하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니까, 그게 열 받아서 그렇게 말했던 거야.”
“텐…….”
“가쿠와 화해할게. 하지만 그 전에…….”
텐은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겨우 말했다.
“류가 가쿠에게 먼저 말 좀 해줄래?”
“좋아, 맡겨줘!”
류노스케는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했다.
텐의 마음이 풀어졌으니 평화에는 거의 다가온 셈이었다. 류노스케는 텐의 방을 나와 가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노크를 하기도 전에 문이 확 열리며 가쿠가 얼굴을 내밀었다.
“텐이랑 무슨 말 했지?”
“으응…….”
“들어와.”
얼떨결에 따라 들어간 류노스케는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다 가쿠가 의자에 털썩 앉자 맞은편 침대에 다소곳이 앉았다. 가쿠는 불량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지 미간에 그림자가 깊었다.
“그 녀석이 뭐라고 하던데?”
“어? 그게……, 가쿠와 화해하겠다고…….”
가쿠는 표정을 더 일그러뜨리며 “하아?”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낮고 빠른 톤으로 “먼저 싸움 걸어놓고서는 무슨 생각이야, 이중인격은 낫지도 않나 보지!”라며 쏘아댔다. 류노스케는 난감한 기분을 미소로 애써 감추며 말했다.
“그런 거 아냐, 가쿠. 텐은 가쿠가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대. 그렇지만 가쿠는 늘 당당하고 멋있으니까, 그래서 쑥스러워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 같아.”
“그거야 그렇겠지!”
류노스케의 말에 가쿠가 버럭 대꾸했다. 그러나 화낼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고서는 겨우 분을 삭였다.
“그런 거 이미 알고 있었어. 나도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응……?”
가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한결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 탓인지 가쿠의 분위기도 조금 느슨해진 것만 같았다. 가쿠는 쯧, 한 번 혀를 차더니 말했다.
“나도 텐이 황금 사과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쑥스러워하는 것도 다 눈치챘고. 그런데 그 녀석은 항상 나를 내려다보고 귀여워하려고 하니까, 그런 태도에 화났던 거라고.”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런 류노스케의 생각을 읽었는지 가쿠가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늘 그래!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하잖아.”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다고 깔보는 게 아니야. 봐줄 생각도 없어. 하지만 말이야, 가끔은 내가 주는 것도 솔직하게 받았으면 좋겠어. 좋으면 좋다고 제대로 말해줬으면 한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가쿠를 보며, 류노스케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항상 그랬다. TRIGGER는 결성 전부터 늘 부딪쳐왔다. 그룹을 생각하는 마음, 팬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서로를 이토록 생각하는 마음이 끊임없이 부딪쳐 모난 곳을 깎듯이 형태를 다듬어 여기까지 왔다. 필시 오늘 이 일도 미래의 시점에서 보면 더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기 위한 세공 과정에 지나지 않겠지.
류노스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쿠의 손을 붙잡았다.
“가쿠, 가자!”
“어, 어딜?”
류노스케에게 이끌려가면서 가쿠가 물었다. 류노스케는 가쿠도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외쳤다.
“당연히, 화해하러지!”
가쿠는 금방이라도 싫다고 손을 뺄 듯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못 이기겠다는 듯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씩 웃었다.
“류가 그렇게 말하면 하는 수 없지!”

*

“……이게 화해의 결과라고?”
카오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화해하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고를 치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류노스케와 가쿠와 텐, 세 명은 반박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카오루는 거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자잘한 유리 파편이 마구 흩어져 반짝거리는 거울의 방이 된 거실을.
류노스케가 텐과 가쿠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눈 후 두 사람을 화해시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불화의 원인이었던 황금 사과는 여전히 덩그러니 거실 한 가운데에 남아 있었다.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내다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 선물이기도 했다. ‘셋으로 쪼개서 나누자’라는 제안이 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사과를 자르려는 순간, 코팅이 벗겨지며 방탄유리 갈라지듯 순식간에 촘촘하게 금이 가더니 황금 사과가 와장창 깨지는 미래를…….
카오루는 두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가 포르티시모로 흘러나왔다.
“너희들 도대체 무슨 생각이니! 얼굴을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아이돌은 얼굴이 자산인데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무서운 기색으로 쏘아붙이는 매니저에게, 세 명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

“그래서, 카오루 짱에게 엄청 혼났다고?”
“모모, 그렇게 웃으면 실례잖아.”
의자가 넘어갈 듯 웃는 모모를 유키가 달래려고 했지만, 가쿠가 웃으면서 넘겼다.
“뭐, 웃을 만한 얘기가 맞으니까요.”
겨우 진정한 모모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래도 재밌는 얘기였네! 뭐, 나였다면 당연히 바로 유키에게 주겠지만!”
그러자 유키가 옅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 그런 사과라면 내가 모모에게 주고 싶은걸?”
“유키 멋져! 하지만 역시 아름다운 건 유키잖아.”
“나에게 제일 아름다운 건 모모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나에게도 제일 아름다운 사람은 유키밖에 없으니까!”
분명 처음에는 서로 아름답다며 칭찬하는 부끄럽고 훈훈한 공기가 한가득 쌓이고 있었을 터다. 그러나 어느새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하더니 어느덧 서로 칭찬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칭찬인지 다툼인지 모를 말이 옥신각신 오가는 가운데, 유키와 모모가 세 명을 돌아보며 동시에 외쳤다.
“너희는 누구 편이야?!”
눈빛이 진지하게 불타는 두 선배를 보며 류노스케와 가쿠와 텐, 셋은 곤란하다는 듯이 서로 마주 보았다. 너무나 익숙한 상황도 우습거니와, 한 명만을 편들지도 못한 채 눈만 깜빡거리는 서로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중 누군가가 풋, 소리를 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retarte_4869

상려

 

보물섬

 

특정 아이돌 그룹 기념일과 어느 섬마을의 축제날이 겹칠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몇 달 전의 아네사기 카오루였다면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다고 손을 내저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네사기 카오루는, 웹에서 싹싹 긁어모은 어느 섬마을의 축제 정보를 TRIGGER 회의실 겸 거실에서 네 부 프린트하는 중이었다. 아네사기가 마우스를 딸깍대는 동안 류노스케, , 가쿠가 소파에 앉아 조잘댔다.

다카라지마의 해신제라면 들어본 적 있어.”

류네 고향이나 가고시마 남부 쪽에서는 꽤 유명한 축제인가 봐.”

취주악곡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있는 지명이었군.”

다카라지마()의 해신제는 평온무사한 바닷길과 만선을 기원하는 작은 의식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섬의 인구가 늘면서 점차 규모가 커진 현재는 이름난 마츠리가 되었다. 최근 관광객이 줄면서 해신제준비위원회는 외부 공연자를 초청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은 연령대 넓은 팬층을 보유한 엔카 가수부터 인지도가 낮은 아이돌 그룹, 코어 팬층을 가진 밴드까지 매년 다양했다.

준비위원회가 올해 TRIGGER에게 컨택을 넣은 이유를 아네사기는 두 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첫째, 업계로부터 독립적인 자치 재정이다. 둘째, 준비위원회에 TRIGGER의 팬이 있다. 아네사기는 후자가 결코 팔이 안으로 굽는 망상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연예계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지금의 TRIGGER는 추락한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다수를 열성적으로 설득할 믿음을 가지고, 근거로써 TRIGGER를 섭외할 경우의 메리트를 알고, TRIGGER의 지방 공연 일정을 꿰고 있는 사람. '팬이 아니라고 생각하기가 더 어렵겠는걸.'

물론 공연비로 제시된 금액은 아네사기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랐다. 본래라면 지방 재정으로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몸값의 TRIGGER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오퍼를 고려한 이유는 단 하나, 공연 날짜 때문이었다. TRIGGER9월 중 남부를 중심으로 지방 공연을 돌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918일에 빈 공연장을 단 한 곳도 찾을 수 없었다. 있더라도 수용인원을 최저선보다 한참 밑도는 규모뿐이었다.

그래서였다. 아네사기가 세 아이들에게 다카라지마의 해신제 프린트를 한 장 씩 나눠주고 있는 까닭은. 아네사기는 대강의 일정과 조건을 설명한 뒤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축제라곤 해도 나츠노시마 음악제보단 훨씬 작은 규모일 거고, 교통도 시설도 불편할 거야.”

"훨씬 작은 라이브하우스에서도 즐겁게 공연했는걸요."

"낭만적이지 않아? 보물섬¹이라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¹ 다카라지마(): 직역하면 보물섬이라는 뜻

아네사기는 무대의 기회 앞에서 만장일치로 눈을 빛내는 세 사람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 비용은 저 아이들에게 마음 쓰게 할 문제가 아니니까.' 지금은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트리거가 건재하다고 알리는 것이 중요했다. 아네사기는 일정을 완전히 재조정해야겠다며 행복한 초과근무에 들어갔다.

 

 

 

 

DAY 1

 

 

 

다카라지마로 들어가는 페리는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내륙에서 첫 번째 배에 오를 때에는 너른 강가에서 승선했다. 승객은 낚시 장비를 챙긴 중년 두어 무리 정도 밖에 없었기에 넷은 강바람이 들이치는 꼭대기 층의 긴 의자에 주르르 앉았다. 순전한 이동만을 목적으로 페리에 탑승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배가 나아가기 시작하자 텐이 난간에 손을 짚고 흰 거품을 토해내는 물살을 내려다보았다. 류노스케와 가쿠가 뒤로 다가서서 같은 것을 눈에 담았다. 아네사기가 펄럭이는 머리칼을 한 가닥으로 느슨하게 묶고는 길쭉한 뒷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스피커를 통해 드문드문 선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세 갈래의 깊은 강줄기가 이곳에서 만납니다." 만을 벗어나자 희미하게 보이던 맞은편의 육지도 사라지고 탁 트인 바다가 배를 둘러쌌다. 이후로는 권태로운 풍경이 이어졌다. 셋은 아네사기로부터 환승지에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듣고 얌전히 아래층의 선실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 섬에 관광객이 줄어드는 이유, 교통이 너무 번거로워서 아냐?"

가쿠가 캐리어를 두 대씩 끌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몇 시간 만에 닿은 섬의 부두에서 오 분 거리에 위치한 다른 선착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리바레(차량)를 타고 왔으면 좋았겠지만, 두 번째로 갈아탈 선박에는 차량 선적이 불가능했다.

항구 특유의 부산한 소음, 갈매기 울음소리, 보도블록에 캐리어 바퀴 밀리는 드르륵 소리가 뒤섞였다. 류노스케가 가쿠 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키웠다.

"그만큼 오염이나 인구밀도가 적어서 일부러 찾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야."

"헤에. 그나저나 류, 가족한테 연락해본다던 건 어떻게 됐어?"

"아아. 역시 아버진 다카라지마를 아시더라고. 친구분 중에 다녀온 분도 있으시대. 근데 요즘 일손이 하나라도 급해서 오기는 힘들 것 같으시다고."

"아쉽네. 모처럼 가까이 있는데."

". 그래도 가을 철맞이가 잘 되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이야."

둘이 짐도 들었겠다 느긋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앞서 걷는 텐, 아네사기와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어쩌다 체구 순으로 무거운 짐 담당이었지만 가위바위보의 우연에 불과했다. 물론 가쿠와 류노스케는 이겼다 해도 텐이 제 키 반만 한 캐리어를 끄는 것을 보다 못해 중간에 가로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텐은 방파제를 배경으로 아네사기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셋 중 가장 사진 센스가 좋은 게 텐이다 보니("나는 보통이고 가쿠랑 류가 너무한 거야.") 아네사기의 사진 담당은 대체로 텐이었다. 아네사기가 모델 못지않게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현장을 발견한 가쿠가, 짓궂게 웃으며 양손에 캐리어를 번쩍 들고 그리로 달려갔다. ", 가쿠!" 류노스케도 캐리어를 가볍게 치켜들고 그 뒤를 따랐다. 베스트컷의 기회를 방해받은 아네사기가 "정말 못살아."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마저 즐거워 보였다.

 

 

다카라지마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점심 무렵이었다. 페리 내 매점 간식으로 끼니를 때운 네 사람의 대화 주제로 부쩍 먹는 얘기의 빈도가 늘었다. 선착장에서 렌터카 밴을 인계받고 아네사기가 숙소까지 차를 몰았다. 해안도로 바로 아래 푸르고 역동적인 정경이 펼쳐졌다. 섬에서 준비해준 숙소는 동쪽 해변 바로 앞에 위치한 여관인 <해원관>이었다. 섬 북쪽에 위치한 부두와 달리 인적이 드물다고 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했으니 지칠 법도 한데, 어쩌면 해수욕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 안의 분위기가 들떴다.

류노스케가 지도 앱으로 섬의 이곳저곳을 확대해 보더니 말했다.

"숙소나 관광지는 대부분 남서쪽 해변에 있네."

양옆의 가쿠와 텐이 동시에 류노스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위성 사진 모드로 전환해보니 남서쪽 해변이 유난히 넓고 하얬다. 백사장인 모양이었다. "모레 축제 무대도 그쪽에 설치될 예정이야." 아네사기가 첨언했다. 반면 그들이 향하고 있는 동쪽 해변은 해변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좁은 면적의 해수욕장이 다였고, 나머지는 초록색이거나 바위 투성이였다. "사람이 적은 덴 이유가 다 있군." 조금 실망한 듯 보이던 가쿠가 화면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 여기 확대해봐."

"여기?"

"뭔데?"

류노스케가 가쿠의 손끝을 따라 확대한 곳은 작은 해변 끄트머리에 위치한 해식 절벽이었다. 텐과 류노스케가 그곳에 쓰인 지명을 읽었다.

"동굴?"

"그런가 본데. , 사진도 있어."

"꽤 본격적인 동굴인데? 시간 나면 가보자!"

다카라지마의 특이한 지형과 인터넷상의 여행 후기와 해산물에 대한 얘기가 오가는 동안 차량은 주차장에 접어들었다. 주차장이라고 해도 휑한 공터가 다였지만, 어딜 가도 이목을 끌고 마는 그들에게 지금은 그것이 기꺼웠다.

여관 입구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노렌 옆으로 커다랗게 <해원관>이라고 쓰인 나무 문패가 달려 있었다. 건물은 1층짜리로, 앞뒤로 넓은 부지에 정돈된 정원이 가꾸어져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나 견고함과 예스러움이 느껴지는 외관이었다. 마침 객실도 딱 4개여서 다른 손님도 없는 셈이었다. 준비위원회의 안배에 아네사기가 내심 감탄했다.

차에서 짐을 내리는 동안, 하얗게 센 머리를 꼼꼼히 틀어 올린 노부인이 마중을 나왔다. 그 옆에 만 대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의젓하게 따라 섰다. 밖에서 노는 결 좋아하는 편인지 반팔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살갗이 짙게 타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현관 앞에 늘어져 있던 고양이가 뒤뜰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노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해원관 주인을 맡고 있는 츠루입니다."

"안녕하세요. 츠루 씨. 전화 드렸던 아네사기입니다."

"아네사기 씨, 반가워요. 이쪽은 미리 말씀드린 손자 마코토예요."

마코토라 불린 아이는 여덟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자 쭈뼛대는 듯싶더니 헤헤 웃었다. 쳐다보던 가쿠, , 류노스케는 물론 아네사기까지 저도 모르게 얼굴이 유하게 풀어졌다.

"같은 건물에 머물겠지만, 불편함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츠루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마코토도 할머니를 따라했다. 가쿠, , 류노스케도 마주 꾸벅하곤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츠루로부터 여관 구조와 근처 시설, 식사시간을 안내받은 뒤에는 각자 묵고 싶은 방을 골라 짐을 풀었다. 네 사람은 방 안에 개인 온천탕이 있음을 알고 화색이 됐다. 두 번의 여객선 탑승으로 소금바람에 절어 있는 그들은 무엇보다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츠루는 저녁 시간을 조금 당겨 주었다. 그리하여 넷은 이른 저녁을 위해 해원관의 식당에 모인 참이었다. 류노스케는 급히 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개인탕 안에서 자기도 모르게 깜빡 졸았다고 했다. 네모난 목재 욕조는 그리 크지 않았다. 텐은 류노스케가 무릎을 삐죽 기댄 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류노스케의 머리카락 끝이 덜 말라 있어 가쿠가 장난스러운 손길로 마구 털어주었다.

네 사람분의 식기가 가지런히 놓인 4인용 식탁에 데친 문어와 새우를 아끼지 않고 올린 샐러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 바로 옆에는 큰 창이 나 있었다. 가쿠와 류노스케가 가까이 앉아 식사를 하면 반드시 팔이 부딪히기 때문에, 텐과 류노스케, 가쿠와 아네사기가 나란히 자리를 꿰찼다.

"동쪽 바다에서도 노을이 보이는군."

창가 쪽에 앉은 가쿠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해가 보이지 않는데도 새털구름이 연주황빛으로 펼쳐져 있고, 온통 분홍빛 파도가 치는 광경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하늘을 뒤덮는 권운과 두드러지게 붉은 노을은 태풍의 전조이기도 했다.

"비라도 오는 건 아니겠지."

일기예보보다 구전 지식을 믿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류노스케가 걱정스럽게 창밖을 바라봤다. 아네사기가 혹시나 싶어 휴대폰 날씨 앱을 열며 말했다.

"기상청에선 별 말 없던걸."

"꼭 전조가 들어맞는 건 아니니까요."

텐이 포크로 샐러드의 토마토를 찍으며 둘을 달랬다. 그릇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을 즈음 츠루가 매끄러운 바퀴 소리를 내는 서빙카트를 밀고 왔다.

"오늘 노을이 유난히 붉긴 하지요."

폭풍우 몰아치기 전날 노을을 누구보다 많이 보아왔을 츠루였지만, 기상청에 별 예보가 없다니 더 말 않고 웃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걱정은 된장국과 쌀밥, 굴찜, 레몬이 곁들여진 고등어튀김, 대하 접시 들이 올라간 차림을 보자마자 쏙 들어갔다.

 

후식으로 녹차 아이스크림과 석류차를 내온 츠루가 가볍게 물었다.

"아홉 시부터 요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바다 구경할 겸 보러 가시겠어요?"

"제사요?"

"전야제 같은 거라 큰 볼거리는 없지만요."

아네사기는 돌아보지 않아도 세 명분의 시선이 느껴졌다. 모른 척 하려야 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너희들, 가고 싶구나?' 게다가 식당 밖 복도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마코토가 자꾸 눈에 밟혔다.

"저희가 가도 될까요?"

"그럼요. 함께해주시면 저희로서도 기쁘죠."

아네사기가 세 아이들을 돌아봤다. 역시나 대놓고 기대에 찬 얼굴 2명과, 안 그런 척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하는 1명이 보였다.

"궁금하면 다녀와. , 술은 금지야!"

"당연하지. 아네사기는 안 가는 건가?"

"난 좀 쉬어야겠어. 나중에 이야기 들려주렴."

아닌 게 아니라 아네사기는 지방 공연 투어와 이어지는 이번 일정을 준비하느라 몇 주 전부터 분주했다. "가기 전에 안마라도 해 드릴까요?" 텐이 아네사기가 바란다면 정말 해줄 기세로 물어와 아네사기가 손사래를 쳤다. "됐네요. 혼자 느긋하게 온천이나 즐길 거란다." 아네사기는 피부에 좋다는 석류차를 한입에 들이켰고, 류노스케가 잠자코 자신의 잔을 양보했다.

 

 

마코토는 낯을 가리지 않는 편이었지만 개중 텐을 잘 따랐다. 일단 류노스케와 가쿠는 어린아이가 올려다보기에 너무 컸다. 그나마 류노스케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생글생글 웃어주었는데, 가쿠는 '?'라는 표정으로 마주 쳐다보기만 해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그래서 세 형들이 시선을 맞추고 앉아 누구랑 손을 잡고 가겠냐고 각자 손을 내밀었을 때, 망설이다가(사실 속으로 답은 나와 있었을 것이라고 가쿠는 살짝 토라졌다) 텐의 손을 잡았을 때도 의외롭지는 않았다.

텐과 츠루의 손을 잡은 마코토가 앞장서고 가쿠와 류노스케가 손전등을 하나씩 들었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를 하나 건너면 나오는 계단을 내려가자 바로 모래사장이었다. 남서쪽 해변만큼 곱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발이 꽤 패였다. 밀물 때면 계단 아래쪽이 얕게 잠긴다고 했다.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초승달임에도 달무리가 크게 졌다. 바다로 부는 바람과 시원한 파도 소리에 보름 전까지 내리쬐던 폭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류노스케와 가쿠는 이 광경을 술과 함께 즐기지 못함에 속으로 한탄했다.

얼마 걷지 않아 사람들이 모인 곳이 보였다. 모두가 길고 흰 웃옷을 걸치고 있어 대번에 눈에 띄었다.

"저게 그 동굴이구나!"

류노스케가 작게 감탄했다.

"밀물 때는 정강이까지 파도가 치는데, 썰물 때가 되면 이렇게 큰 모래톱이 나타나요."

흰 옷을 입고 똑같은 가면을 쓴 사람들이 촛불을 하나씩 든 채 느린 걸음으로 동굴에 들어갔다. 행렬이 꽤 긴데도 동굴 안에 공간이 충분한지 들어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가면은 각자 직접 만들었는지 조금씩 모양이 달랐지만, 커다랗게 튀어나온 두 눈과 시뻘겋게 벌린 입을 공통 요소로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본다면 무서워할지도.' 텐이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을 붙든 마코토를 내려다봤다. 다행히 마코토는 익숙한 풍경이라서인지 원체 겁이 없는 건지 조금 지루한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해신제 행사는 남서쪽 해변에서 열리던데."

"그러네. 제사만 여기서 하는 이유가 있나요?"

가쿠와 류노스케의 의문에 츠루가 바다 쪽으로 돌아섰다. 먼 바다는 어둠에 잠겨 하늘과 물도 분간되지 않았지만, 츠루의 눈은 그 너머의 뭔가를 보는 것처럼 똑발랐다.

"이곳 사람들은 동쪽 바다 멀리 선조들이 향하는, 신들이 사는 낙원이 있다고 믿어요." 류노스케도 아는 구전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에 한 번 선조들이 찾아오면, 그들을 환영하고 새 생명을 보내 주시라고, 또 무사한 뱃길과 만선을 기원하며 동굴 안에서 제사를 올리죠."

"고모도 와요! 엄마아빠도!"

마코토의 첨언에 세 사람의 말문이 막혔다. 씩씩한 어조였을망정 가벼운 내용은 아니었다. 츠루가 마코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신경쓰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 애 애미애비가 일찍 가고, 줄곧 돌봐주던 딸애도 반년 전에 물질을 나갔다 못 돌아왔거든요."

"."

"오늘 밤의 제사는 맞아들이는 의식, 내일 제사는 보내는 의식인 셈이죠."

마코토가 따분한 눈치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동굴 속으로 사라지는 행렬에서 눈을 떼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다를 건너오는 해신과 낙원의 선조들은 종종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신제는 백중처럼 망자를 기리는 의식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이 마을 분들께 해신제는 의미 깊은 축제겠어요."

"맞아요. 그러니 손님들과 나눌 수 있어 기쁘답니다." 츠루가 TRIGGER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시대에 뒤처진 영감들도 있긴 하지만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DAY 2

 

 

새벽부터 류노스케의 잠을 깨운 것은 낮게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였다. 문을 열고 잤던 터라 얇은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급하게 문을 닫는 류노스케의 팔뚝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달라붙었다.

"큰일이네. 오늘이 공연인데."

아침식사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있었지만 이대로 혼자 전전긍긍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류노스케는 세수만 하고 타올로 얼굴을 닦으며 방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창가에서 이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아네사기와 가쿠가 류노스케를 돌아봤다. 이어 텐의 방문도 열렸다.

강우량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산 없이 빠른 걸음으로도 다닐 만해 보였다. 더 심한 날에도 최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지 않았던가. "계속 이 정도로만 내린다면 어떻게든." 그러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어두운 복도가 환해질 정도로 눈부신 번갯불이 창문마다 내리질렀다. 곧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잇따르는 바람에 귀가 먹먹해진 네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뇌성의 잔음이 가시고 나자 아까보다 훨씬 거세진 빗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가쿠가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단순한 소나기가 아니라 태풍에 가까운 것 같았다. 아네사기가 '맑음'에서 정보값이 변하지 않는 날씨 앱을 몇 번이나 새로고침하고서야 모두의 휴대폰에 기상경보가 울렸다. 며칠 전부터 누구보다 날씨정보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아네사기가 분통을 터뜨렸다. "전혀 예보의 의미가 없잖아!"

거실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마코토인가?"

"방금 천둥소리는 대포소리처럼 컸으니까."

"무서워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거실로 향하는 문을 연 네 사람에게 보인 것은, 막 현관을 나서려던 츠루의 모습이었다.

"츠루 씨!"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어디 가세요?"

가쿠, , 류노스케가 깜짝 놀라 현관에 다가서자 츠루가 그들을 돌아봤다. 언제나 침착하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우비를 여미는 손도 떨리고 있었다.

"……마코토가 없어요."

"?"

"그 애는 내내 해신제 기간에 그 동굴에 가고 싶다고 말해 왔어요. 둘째 날 닫는 제사를 올리기 전에."

"죽은 사람의 영이, 온다고 믿으니까요?"

그래서 고모랑 부모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올해는 하늘이 심상찮으니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츠루가 우산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츠루 씨!" 가쿠가 다급하게 맨발로 현관에 내려섰다. "저희가 가게 해주세요." 텐이 우산을 짚은 츠루의 손을 부드럽게 덮었다. 핏줄이 불거진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츠루는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손자가 걱정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지인은 폭풍을 타고 농울치는 파도의 무서움을 몰라요." 수십 년 간 파도의 결을 따라 살아온 사람으로서 되돌리는 사양이었다. "곧 밀물이 들어옵니다. 이런 궂은 날씨엔 쓸려갈지도 몰라……."

"!"

그때 한발짝 나선 것은 류노스케였다. 그는 뭔가를 다짐하듯 양손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오키나와의 바닷가에서 자랐습니다."

"."

"어부인 아버지 밑에서요."

예전이었다면 엄격히 금지되었을 발언을 토하는 류노스케의 말씨는 평온했고 언뜻 자부심까지 엿보였다. 그의 심성을 닮은 강직한 목소리에는 그에게 맡기면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믿고 싶어지는 힘이 있었다. 츠루의 눈빛이 흔들렸다. 빗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누구보다 이곳의 물살에 익숙하다 해도 상당한 위험부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츠루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츠루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마코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네사기는 츠루의 곁에 남았다.

TRIGGER는 아네사기를 숙소에 남겨두는 이유로 '위험하니까' 같은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아네사기 씨가 저지선이니까.', '아네사기 씨가 없으면 중간에서 연락이 안 되니까.', '여차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네사기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아네사기에게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치면 안 돼!" 셋이 현관을 나서기 직전 아네사기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당부했다. 스케줄에 지장을 주니까, 그리고 너희들이 걱정되니까. 두 염려는 TRIGGER와 그들의 매니저인 이상 떼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절실한 부탁이었다. 그들이 들어있던 유리 케이스는 산산조각난지 오래인데도 아네사기는 매번 새로이 부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네사기 본인도 케이스 밖으로 걸어 나온 당사자면서, 가끔 이 아이들을 그 안온한 상자에 다시 넣어두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전제 아래서만.

 

문을 열자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던 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 현관 안으로 쏙 들어왔다. 츠루가 수건으로 고양이를 감싸 안아들며 세 사람을 배웅했다. 셋은 한 발짝 내딛지마자 광풍에 휩싸였다. 우산을 가져왔다면 펼치는 대로 뒤집혔을 풍속이었다. 뒤집어쓴 우비 모자 비닐에 빗방울이 다다닥 부딪혀 셋은 거의 소리지르다시피 말해야 했다. 오후의 공연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터라 목을 아껴야 했으므로 결국 침묵 속에 해변가로 내려섰다. 밀물 때 발목께에서 출렁거린다던 해수면은 무릎까지 차올라 있었다. 물살이 다리를 부여잡고 파도가 부딪치면 물이 허리까지 튀었다. 어제는 금방이었던 동굴까지의 길이 까마득했다. 언제 가까운 바다에 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초조함이 더해진 탓도 컸다.

세 사람은 숙소를 나선 지 체감상 삼십 분, 실제로는 십 분 만에 동굴에 들어섰다. 사방에서 매섭게 때리던 빗물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숨을 돌렸다.

"쥐 날 뻔했어!"

"춤 출 때도 다리에 이렇게까지 힘 들어갈 일은 잘 없다고."

유일하게 장화를 신은 텐이(여관 신발장에는 여러 종류, 다양한 크기의 신발이 있었지만 류와 가쿠의 발에 맞는 사이즈는 없었다) 축축한 동굴 벽을 짚고 서서 장화를 뒤집어 물을 쏟아냈다. 그사이 가쿠와 류노스케가 내부를 살폈다. 나름 관광지이기 때문인지 동굴 안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옅은 조명이 달려 있었다. 구석구석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깜깜하지도 않았다.

"손전등 켤까?"

". 근데 안 가져왔어도 됐겠다."

"만전을 기해서 나쁠 건 없어."

가쿠가 품에서 손전등을 꺼내 켜자 밝은 빛이 동굴 안을 직선으로 비추었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니 파도가 거의 치지 않았지만, 바깥에 빗줄기 깨지는 소리가 울려 귀가 먹먹했다. "어이, 마코토!", "마코토 군!" 안으로 나아가며 종종 외치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간밤의 의식 때 적지 않은 인수가 줄줄이 들어갔던 만큼 동굴은 꽤 멀리까지 이어졌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화를 하는데도 부딪혀 돌아오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가쿠, 저길 비춰봐."

류노스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벽에서 돌출된 평평한 바위와 그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의 다리가 보였다. 손전등 빛을 받은 다리의 주인이 누군지 깨닫자마자 셋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갔다.

"마코토!"

암석은 크게 2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낮은 단에는 심지 굵은 촛불이 여러 개 켜져 있었다. 어젯밤 밝혀놓은 촛불인지 한두 개는 이미 촛농만 눌어붙어 있기도 했다. 마코토가 누워 있던 최상단은 인위적일 정도로 평평했다. 아마도 제사 음식을 올려놓는 곳인 것 같았다.

다행히 마코토는 정상적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요란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지축이 울리는 와중에 깰 줄을 모른다면, 어딘가 다쳐서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섣불리 일으키지 못하고 어깨를 살짝 잡자 그제야 마코토가 눈을 떴다.

"정신이 드니?"

"다친 덴 없어?"

"?"

멀쩡히 일어나 앉은 마코토는 그들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쿠, , 류노스케를 번갈아 보다가, 곧바로 커다란 천둥소리가 동굴을 울리자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작게 보이는 동굴 입구는 새까맣다가 번개가 칠 때마다 밝아졌다.

"비가."

"설마 오는 줄 몰랐어?"

"새벽엔 안 왔는데……."

당황한 것은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여기서 잠든 거였다고?' 그러나 마코토가 "조금만 있다가 돌아가려고 했어요"라며 훌쩍이기 시작하자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 되었다. 마코토는 커다란 천둥소리에도, 모든 게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아마 할머니를 걱정시켰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놀란 것 같았다. 텐이 촛불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며 무릎을 굽혀 마코토의 손을 감쌌다.

"괜찮아. 우리가 안전하게 데려다줄게. 약속해."

"너무 걱정 마. 츠루 씨도 화 많이 안 났어. 아마도!"

물이 차기 전 이곳에 들어왔을 마코토의 옷이 축축했다. 천장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에 옷이 젖어든 탓이었다. 류노스케가 마코토를 달래며 소맷귀로 목과 귀 부분을 닦아주었다. (류노스케의 옷도 이미 젖어 있었기 때문에 별 소용은 없었다.) 텐과 류노스케는 마코토가 울면서도 띄엄띄엄 뭐라 말하는 것에 응, . 하며 귀를 기울였다.

 

가쿠는 갑자기 물의 수위가 높아지지는 않는지, 안쪽에 위험한 건 없는지 손전등을 비추며 살폈다. 동굴에 설치된 조명은 훨씬 안쪽까지 이어졌으나, 간격이 너무 넓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극히 희미한 조명 아래 뭔가 움직인 듯해 가쿠가 미간을 좁혔을 때였다. 동굴 깊은 곳까지 훤히 밝히는 눈부신 벼락이 떨어졌다.

"깜짝 놀랐네!" 류노스케가 마코토를 의식해 오버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했지만, 가쿠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잦아드는 번갯불 속에서 무시무시한 가면을 쓴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마을 사람들이 썼던 가면과 같은 종류였다.

"어이."

가쿠가 헛숨을 삼키며 형체가 서 있던 쪽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류노스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코토를 달래고 있었기 때문에, 가쿠의 가까이 서 있던 텐만이 가쿠의 이상을 눈치챘다. 텐이 의아한 시선으로 손전등 플래시를 좇았다.

"왜 그래?"

"방금 사람이, 분명."

당황한 기색의 가쿠는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가면이 보였던 곳 주변으로도 이리저리 불빛을 비춰보았지만 그곳에는 축축한 동굴 벽뿐이었다. 텐은 가쿠의 얼굴과 흔들리는 불빛을 번갈아 봤다. 사람을 봤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봉변을 당한 사람이라면 데려가야 했다. 사람이라면.

"가쿠, . 무슨 일 있어?"

류노스케가 의아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봤다.

"저쪽에."

"아냐."

가쿠는 무언가를 보았던 쪽으로 손전등을 내밀며 뭐라 대답하려 했으나, 텐이 가쿠의 말을 끊었다. 텐은 가쿠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

가쿠는 낌새가 좋았다. 텐은 감이 좋았다.

"돌아가자."

단호하게 맺는 텐의 말에 가쿠가 천천히 손전등을 거뒀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류노스케가 자신의 우비를 벗어 마코토에게 입혔다. 당연히 마코토에게 너무 큰 우비는 자꾸 흘러내렸고, 결국 가쿠가 류노스케에게 마코토를 업힌 뒤 그 위에 우비를 둘러주었다.

등에 어린아이의 무게를 지고 있는데도 류노스케의 발걸음은 아까보다 한층 가벼워졌다. 마코토가 여전히 풀 죽어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아이의 기분을 돋우기 위해 우스갯소리를 했다. 지극히 직업병에 가까운 작용이었다.

"그래서, 천둥이 치자마자 겁에 질린 텐이 뛰쳐나와서."

"제일 먼저 나와서 아네사기 씨한테 무섭다고 매달린 게 누군데?"

"? 가쿠랑 텐, 천둥 무서워했던가? 진작 날 깨우지!"

". 진지하게 받지 마."

만담 같은 대화에 마코토가 쿡쿡대며 웃었다. 그를 곁눈질한 가쿠와 텐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대화가 멎었는데도 사위가 고요했다. 바닷물에 세차게 내리붓던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낮은 수위의 밀물을 찰박대며 나아가는 소리뿐이었다. 어둡기만 하던 입구가 조금 밝아진 것 같기도 했다.

", 그쳤나 본데."

"이렇게 갑자기?"

손전등을 끈 가쿠의 말에 텐과 류노스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까워지는 입구를 주시했다. 마코토도 류노스케의 어깨를 짚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는 어둡기만 했는데, 이제 파도의 주름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똑똑 떨어지는 것은 동굴 입구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이었다. 바람이 여전히 거셌기에 파도는 높았지만, 구름도 그만큼 빠르게 걷히고 있었다. 먼 하늘은 벌써 맑아져 수평선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뭐 이런 날씨가."

"다행이네!"

동굴을 빠져나오자 억센 바람이 젖은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류노스케의 머리칼도 마찬가지여서, 사방으로 튀는 빗물을 정면으로 맞은 마코토가 까르르 웃으며 류노스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파도가 닿지 않는 계단에 이르자 류노스케가 마코토를 내려주었다.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마코토의 걸음이 무거워졌다. 땅을 보며 발을 질질 끄는 것을 보아하니 츠루에게 혼날 일이 벌써부터 걱정인 듯했다. 류 왈, '큰소리를 내실 분으로는 안 보였는데.'. 텐 왈, '원래 조용히 화내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야.'. 텐을 바라보며 가쿠 왈, '알 것 같군.'. 속닥거리던 세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곤 마코토에게 다가가, 어젯밤 누구와 손을 잡을지 물었을 때처럼 쭈그려 앉았다.

"마코토, 손 잡고 갈래?"

눈앞에 세 개의 손이 내밀어진 마코토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 형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마코토는 누구의 손을 택하는 대신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슬쩍 웃었다.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씩씩한 대답을 듣고 셋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가자." 처지던 걸음걸이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장 앞서 걷는 사람이 마코토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넷은 빗물과 바닷물로 푹 젖은 몸을 공동 욕탕에서 사이좋게 씻고 나왔다. 마코토가 처진 눈으로 츠루에게 불려 간 후엔 문 너머로 조곤조곤 훈계하는 츠루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네사기는 한숨 놓은 기색이 여실했다. 그는 수건을 덮어쓴 TRIGGER에게 준비위원회에서 보내준 사진을 보여주었다. 미리 설치해둔 무대가 엉망으로 파손되어 있었다.

"심하네."

"다친 사람은 없대요?"

"그나마 서쪽 해변은 비바람이 덜 몰아쳐서 다른 피해는 없는 모양이야. 어머, 잠깐만."

[해신제준비위 이시하라], 사진을 띄우고 있던 아네사기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 아네사기입니다. . . 무사히 돌아왔지 뭐예요. 하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무대 쪽은. 아아, 인력이. 그러면 언제쯤……. 리허설은 고사하고 본공연 시간까지도 아슬아슬하다고요. ……. 아녜요. 일기예보도 전혀 없었는걸요. 그렇지만. 척 듣기에도 상황이 나빠 보였다. 아네사기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을 본 가쿠가 툭 던졌다.

"우리가 가서 도와주면 안 되는 건가?"

아네사기가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지만, 상대방에게도 들렸는지 스피커 건너편이 조용해졌다. 이상한 말을 했나 싶어 쫄 만도 한데 가쿠는 어때? 하고 의견을 구하듯 텐과 류노스케를 돌아볼 따름이었다.

"좋네!"

"가쿠다워."

"칭찬이냐?"

"너희들……."

이마를 짚던 아네사기는 전화기 너머에서 '저어.' 하는 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시하라 씨. 들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나름 장정에 무대도 익숙하니 걸림돌은 되지 않을. , . 호호. 그럼요. 너무 부담은 갖지 마시고…….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는지 아네사기의 얼굴이 차츰 풀렸다. 현장의 수습이 아이돌의 몫으로 이어지다니, 현장이었다면 피차 부담이었겠지만. . 마을의 축제이잖은가. 아네사기는 데뷔 초 학교 축제에서 온갖 기상천외한 일을 타계하고 왔다는 츠무기의 사연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위원회 측은 TRIGGER만 괜찮다면 부디 부탁드리고 싶다는 인사로 통화를 마무리지었다. 아네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엄격함 반, 어이없음 반 섞인 얼굴로 세 골칫덩이들을 돌아봤다.

"너희들, 아이돌이라는 자각은 있는 거지?"

"그럼!"

"대답만 시원시원해가지고. 아침 먹고 출발하자."

꿍얼대는 아네사기는 한숨을 폭 내쉬면서도 차키를 챙겼다.

"더러워져도 되는 옷으로 갈아입는 게 낫겠지? 어라, 나 여벌 챙겼던가."

", 내 바츠마루 티셔츠 줄까?"

"가쿠, 아네사기 씨 울겠어."

"옷이나 갈아입으러 가렴. 당장!"

 

 

차에서 내린 아네사기는 사진에서 보인 것보다 심각한 현장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을 준비위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흩어진 자재를 수습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혼란스럽게 지시하는 고함이 들리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은 TRIGGER와 아네사기에게 관심을 둘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때 멀리서 준비위원회 단체 티셔츠를 입은 젊은 여성이 아네사기를 부르며 달려왔다.

"아네사기 씨 맞으시죠!?"

"이시하라 씨."

기획 겸 현장 총괄 중 한 명인 이시하라의 한 손에는 쉴 새 없이 메신저 알림이 뜨는 휴대폰이, 다른 한 손에는 계획표며 무대 도면 등이 잔뜩 들려 있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이런 상황이거든요."

"아닙니다. 저희도 반드시 오늘 무대를 하고 싶어서요."

"뭐든 시켜주세요!"

이시하라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엿보였지만, TRIGGER를 보는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네사기는 직감적으로 TRIGGER를 해신제의 무대에 추천한 건 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 마음 깊이 믿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이시하라가 손을 모아 두세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멀리서 몇몇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 마침 잘 도착했네. 이 두 사람이 도우러 왔다는 그 청년들이지?"

이시하라가 불러온 이들 중 가장 건장한, 민소매 차림의 사내가 퍽 살갑게 일행을 맞았다.

"아뇨! 이분들은."

". 여기 장갑 잘 끼고."

이시하라가 뭐라 설명하려 했으나, 사내는 듣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류노스케와 가쿠에게 목장갑을 건넸다. 둘이 목장갑을 끼자마자 사내는 둘을 끌고 사라져 버렸다. "얘들아. 제발 몸조심하고!" 아네사기의 외침에 가쿠가 엄지를 치켜들어 텐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무대장비에 비교적 익숙한 텐은 음향 담당을 소개받았다. 왜인지 면목 없어 보이는 담당자는 "죄송해요. 지금 상황이 좀." 하고 다짜고짜 사과했다. 의아해하던 텐은 음향팀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들은 텐에게 짤막하게 인사한 뒤 말다툼을 이어갔다.

"아니, 이거 못 쓰는 거 맞다니까요. 해봐도 소리가 안 나잖아요."

"다른 건 다 멀쩡한데 왜 이것만 안 돼?"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말없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자, 텐을 데려온 담당자가 슬쩍 상황을 알려주었다. 평소에 수리를 담당하던 인력이 마침 자리를 비워서, 설치와 간단한 문제해결이 고작인 사람만 남아 곤란해하는 중이라고 했다. 텐이 문제의 스피커 모델과 종류를 살핀 뒤 아직도 말다툼 중인 이들에게 물었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가수라더니 이런 것도 볼 줄 아쇼?"

그들은 텐의 어려 보이는 외형에 대놓고 의심하는 투로 대답하면서도 별수가 없어 공구함을 건넸다. 그러나 텐이 자리를 잡고 능숙하게 스피커를 분리하기 시작하자 미심쩍은 시선은 대번에 기대로 차올랐다. 몇 분 가량 유닛을 살피던 텐이 문제가 있는 부품을 보이며 말했다.

"고음드라이브 코일이 탔네요."

"그럼 어떡합니까?"

"당장 대체품이 없다면. 코일을 새로 감으면 될지도요."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보기만 했다. 어떻게 하는지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생각보다 갈 길이 멂을 깨달은 텐이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한편 류와 가쿠는 환대 속에서 쉴 새 없이 불려다녔다. 뭘 시켜도 싹싹하니 지칠 줄 모르는 두 청년은 한껏 부려진 후에 특제 김밥을 점심으로 대접받았다. 간이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하던 이들 중 한 명이 나중에 딸에게 줄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하자, 둘을 데려왔던 사내가 크게 놀랐다.

"? 야오토메랑 츠나시가 오늘 공연하는 연예인이라고?"

"그렇다니까. 자네 또 이시하라 소개 제대로 안 들었지? 그보다 TV는 보고 살아?"

"아하하. TRIGGER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쪽에, 스피커 쪽에 보여? 쿠죠 텐이라는 녀석까지 셋이서 한 팀이야. 보러 와줄 거지?"

"으핫핫! 당연하지! 훤칠하다 싶더니 그런 줄도 모르고 막 부려먹었구먼."

사내가 화통한 웃음을 터뜨렸다. 쾌활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맞은편 노인의 혀 차는 소리였다. 가쿠와 류노스케는 직감했다. '츠루 씨가 말씀하신 '시대에 뒤떨어진 영감'이구나!' 표정을 굳힌 둘을 향해 사내는 신경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지만, 노인이 마뜩잖은 투로 중얼거렸다.

"삿된 외지인 같은 걸 불러오니까 오늘같이 머리 푼 놈이 바다에 서는 게야."

"할아범. 밥 먹는데 괜한 말 할 거야?"

사내가 가벼운 어조로 제지하자 노인은 사내를 흘겨보며 자리를 떴다. 사인을 부탁했던 남자가 머쓱해하며 대신 사과했다.

"미안. 악의는 없을 거야. 섬 개방에 부정적인 영감탱이가 몇 있어서 그래."

"게다가 여기 노인네들은, 이 시기의 폭풍이 저 너머의 것들을 데려온다고 믿거든."

"'저 너머의 것'이요?"

"괴담에 나올 법한 거 있잖아. 가면 쓴 마을 사람과 섞이는 사자死者라든가. 근데 도시 사람들도 이런 거 믿나?"

가면 쓴 사자라는 말에 가쿠는 아침에 동굴에서 목격한 뭔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괜히 팔에 소름이 돋아 마구 문지르자 사내는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보기보다 순진하구먼! 너무 진지하게 받지 말게." 류노스케는 가쿠의 반응에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곤 웃는 낯으로 화제를 돌렸다.

 

 

먼저 밴에 돌아와 뒷좌석에 기대 있던 텐이 차 문 열리는 소리에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꼿꼿한 자세였지만 얼굴에 묘하게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어이, . 왜 몸을 쓴 우리보다 네가 지쳐 보이냐?"

반팔 목부분을 마구 펄럭이는 가쿠가 보조석에 타서 냉방을 최대로 올렸다. 류노스케도 뒷자리에 올라 앉아 에어컨 날개 방향을 조절했다.

"텐은 음향 담당 아니었어? 우리 들어올 때 그쪽 사람들이 네 칭찬 엄청 하더라!"

"좋은 경험을 했어. 가쿠랑 류는 괜찮아? 자재가 엄청 무거워 보이던데."

"아하하, 내일 조금 근육통이 있을지도. 아네사기 씨한테는 비밀이야!"

"누구한테 비밀이라고?"

마지막으로 아네사기가 운전석에 올라타며 백미러를 째릿 노려보자 류노스케가 멋쩍게 웃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서 준비하고 다시 오는 거였나?"

"아네사기 씨가 왔다갔다 고생이시네요."

", 이 정도로 일일이 수고스러워하다간 TRIGGER 매니저 못 해."

차창 너머로 흐르는 풍경은 처음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멀끔해져 있었다. 첫 무대 시작까지 한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 찾아온 사람들도 띄엄띄엄 보였다.

저 중에 우리들의 팬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수런거렸다. 만나고 싶어서, 전하고 싶어서. 우리는 멈춰 선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견디는 것이라고. 잠시 가라앉았을 뿐,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고. 최고를 뛰어넘는 무대로그렇게 전하고 싶어서, 사랑을 담아 노래하고 싶어서 가슴이 뛰었다. 다른 두 사람도 같은 마음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그 말이 튀어나왔다.

"빨리 만나고 싶다."

"그러게."

"나도 마침 그 생각하고 있었어!"

"아아 정말, 어쩔 수 없는 애들이라니까!!"

 

 

◆ ◆ ◆

 

 

"함성으로 맞아주세요. TRIGGER!"

사회자가 TRIGGER를 소개하자 비명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무대의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는 그룹답게 여느 때보다 열광적인 반응이었지만, 모든 관객이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관객 그룹에 따라 온도 차가 극명하게 갈렸다. 이곳에는 멀리서 찾아온 TRIGGER의 열성팬도, 그들이 아직 활동하는 줄 몰랐던 대중도, 불명예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린 연예인이 마뜩잖은 주민도 있었다. 아까 가쿠와 류노스케를 향해 악의 어린 말을 뱉었던 노인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이 무대는 TRIGGER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콘서트홀과도, 그들에게 호의적인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화려한 스튜디오와도 달랐다. 그럼에도 간이 계단을 올라 자신들이 일궈낸 무대를 밟는 TRIGGER의 의연한 걸음걸이는 언제나와 같았다. 어떤 돌풍도 거친 파랑도 흔들 수 없는 질량의 발걸음은, 내딛는 순간 그곳을 지고의 왕좌로 장악한다.

첫 곡이 시작되기 직전,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TRIGGER는 검은 실루엣으로만 남았다. 서쪽으로 잠기는 태양이 더없이 따스한 색채로 수면을 물들였다. 꿈을 꾸기 시작하는 시간, 황혼을 맞이하는 사람들. 잔물결의 반짝임은 단 한 순간도 멈춰있는 법 없이 시선을 빼앗았다. '우리를 봐. 시선을 돌리지 말아줘.' 빛나는 것은 눈길을 끈다. 그 단순하고 자명한 이치로 TRIGGER는 여기에 이르렀다.

소원을 보내는 노래의 첫 소절 부르는 텐에게 핀라이트가 꽂히고,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로 묶이는 순간 조명이 퍼져나간다. 수평선이 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지금 이곳에 TRIGGER보다 빛나는 것은 없었다.

류노스케는 이 곡을 무척 사랑했다. 차갑고 깊은 바닷속의 이미지가 담긴 노래인데도 부르고 있으면 마음이 뜨거워졌다.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을 기꺼이 나눠주는 사람들. 이곳에 서서 얻은 자신의 보물이었다. 노래 한 곡으로, 무대 한 번으로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좋아해 줄 거라고는 기대치 않는다. 다만 우리가 정말 그 노인의 말처럼 태풍을 불러오는 방아쇠라면, 오늘 폭풍우를 잊을 만큼 막강한 파란을 일으켜 주겠노라고 생각했다. 텐과 가쿠가 함께라면 될 것 같았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곡은 <DIAMOND FUSION>. 강렬한 사운드와 동시에 폭발적으로 점등된 조명이 눈부셨지만 가쿠는 힘껏 눈을 떴다. 누군가는 '무서워 보인다'고도, '힘있다', '멋있다'고도 말하는 바로 그 눈이었다. 자신들을 사랑해주는 시선뿐만 아니라, 무관심하게 관조하는 눈, 탐탁잖게 여기는 눈, 그 모든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가쿠는 그렇게 눈을 떴다. 전하고 싶다. 첫사랑과도 같은 두근거림을, 보석과도 같은 진짜 반짝임을 울려퍼지게 만들고 싶다. 태풍의 눈을 지키고 서는 굳건한 축이 되겠노라고 다짐하는 각오를 봐줬으면, 들어줬으면 했다.

앙코르 첫 곡인 <DAYBREAK INTERLUDE>가 끝나고 짧은 멘트를 하며, 텐은 앞열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봤다. 그는 텐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활짝 웃었다. 마음이 옥죄었다. 상처 받지 말아 달라고, 웃어 달라고 소원하는 마음을 꿰뚫린 기분이 들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강하게 만드는가. 울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는 용기에 도리어 지켜지고 있었다.

"진짜 마지막 곡입니다! 우리들과 함께, 깨지 않는 꿈을. <SECRET NIGHT>."

텐은 관객석을 향해 웃음을 되돌렸다. 끌어안는 듯한 극상의 미소였다.

 

 

◆ ◆ ◆

 

 

깊어가는 밤하늘에는 초승달 가까이 금성이 걸렸다. TRIGGER와 마코토는 그리 길지 않은 모래사장을 산책하고 있었다. 막 썰물이 밀려나가고 있어 신 아래 갯벌이 밟혔다. 가쿠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마코토를 쫓으며 놀아주고 있었는데, 파도에 습격당해 신발을 흠뻑 적시고 말았다. 멀리까지 도망친 마코토가 깔깔대며 웃었다. "나잇값." 텐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가쿠가 기왕 젖은 발로 파도를 콱 밟아 물을 튀겼다. 텐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류노스케의 뒤에 숨었고, 대신 류노스케가 신발에 바닷물을 뒤집어썼다. 류노스케는 벙쪘다가 곧 마구 웃더니 신발을 벗었다. 가쿠와 류노스케는 각자 양손에 젖은 신발을 달랑거리며 정답게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텐은 한 손에 손전등, 한 손에 마코토의 손을 잡고 젖지 않은 모래 위를 걸었다.

절벽이 가까워지며 따라 걸을 수 있는 해안길이 거의 끝나가고, 예의 동굴이 눈에 들어오자 마코토가 멈춰 섰다. 그러곤 짐짓 결연하게 말했다.

", 형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마코토가 동굴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비밀인데. 진짜 멋진 거요. 지금밖에 못 봐요."

가쿠, , 류노스케는 시선을 교환했다. '아침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무섭지도 않나?', '밤엔 역시 위험하지 않을까?', '탐험 같아서 두근거리네!' 텔레파시 송수신에 실패한 셋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쿠였다. 짐짓 엄격한 어조였다.

"할머니가 또 걱정하시는 거 아냐?"

"그치만 형들이 구하러 와줬으니까 보답하고 싶어서."

"으음"

"보물 같은 건데……. 안 돼요?"

마코토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본 뒤 마지막으로 텐을 빤히 올려다봤다. 졸리는 것에 유구히 약한 텐이 천천히 두 사람을 바라봤다. '넘어갔구만.', '텐은 아이한테 참 상냥하다니까.' 류노스케가 싱긋 웃었고 가쿠가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바로 나오기야."

물론 안전에 엄격하단 점에서는 텐도 지지 않아서, 마코토의 앞에 쭈그려 앉아 길고 얇은 소지를 내밀었다. 마코토가 "!"하고 함성을 지르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엮은 손가락을 두어 번 흔들고 셋은 마코토의 뒤를 따라 동굴 안으로 향했다. 밤에는 방문자가 거의 없어서인지 동굴 안에 설치되어 있던 조명은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조도가 낮았다.

"이 동굴에 내려오는 괴담이 있는데"

"마코토. 그만두는 편이 좋아. 가쿠 형아는 겁이 많거든."

"? 아침에 여기서 빨리 나가자고 재촉하던 게 누군데?"

"그건"

'그건 네가 특이한 걸 봐버렸기 때문이잖아.' 텐은 항변하려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뭣해서 입을 다물었고, 찾아올 뻔했던 침묵을 류노스케가 빠르게 채워 넣었다. "세 사람 다 너무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이미 아는 길이라 그런지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덕분에 아침에 체감했던 것보다 빠르게 마코토가 안내하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셋이 폭풍우를 뚫고 찾으러 왔을 때 마코토가 누워있던 바위 제단이었다. 그땐 경황이 없어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척 봐도 신성한 공간일 것처럼 생겼다. 그래서 마코토가 돌 어귀를 밟고 올라섰을 때는 세 사람 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 그래도 돼?"

할머니도 음식을 올려둘 때 같이 눕지만 않으면 된댔는걸.”

마코토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제단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츠루 씨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거려나?' 셋이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동안 마코토는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다. 제단은 직사각형이었으나 세로 폭도 넓은 편이어서, 마코토는 무릎까지 몸을 눕힐 수 있었다.

"형들도 와서 저처럼 누워봐요!"

마코토가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키고 손짓했다. 세 사람은 자신들 정도면 꽤 대범한 편이 아닌가 생각해 왔으나, 과연 그 요청에는 멈칫하고 말았다. 마을의 성지 같은 것이라 그런지 망설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형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을 깨달은 마코토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손님들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할머니의 당부가 떠오른 탓이었다.

마코토가 얌전해졌음을 깨달은 류노스케의 눈꼬리가 처졌다. '아이니까 보챌 법도 한데.'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을 딱 감고 발을 옮겼다. 류노스케의 돌발 행동에 놀란 가쿠와 텐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마코토가 기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류노스케의 손을 잡아끌었다. "등 안 젖어요. 여기 바위는 물이 금방 마르거든요." 마코토가 힘껏 올라야 했던 제단을, 류노스케는 스탠딩 의자처럼 가볍게 걸쳐 앉았다. 가공할 만한 신장을 가진 성인 남성이 제단에 머리를 대고 누우려니 허리가 직각에 가깝게 꺾였다. 두 발이 땅에 닿고 그럭저럭 편한 자세를 찾은 류노스케가 드디어 돌 위에 머리를 두고 눈을 떴다. 그렇게 동굴 천장을 눈에 담은 본 류노스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결국 가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때?"

"—…. ………. 둘도 와서 누워봐."

류노스케는 뭔가 설명하려는 듯 입을 뗐다가 포기하고 누운 채로 손짓을 했다. 류노스케의 반응은 둘의 호기심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도대체 뭔데?"

텐이 제단을 향하자 가쿠도 팔짱을 풀며 그 뒤를 따랐다. '. 천벌이 내린대도 이 셋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텐은 마코토를 중간에 두고 누웠다. 등 뒤로 손을 짚고 가볍게 뛰어 앉은 텐의 발끝이 류노스케와는 달리 바닥에 닿을락 말락 동동거렸다. 가쿠가 눕기에는 류노스케 옆모서리의 공간이 아슬아슬했기에, 가쿠는 올라앉는 대신 두 팔꿈치를 대고 상체만 젖혔다.

이내 가쿠와 텐의 입이 벌어졌다. 류노스케의 반응이 대번에 이해 갔다. 천장이 있어야 할 곳에는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동굴 천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건가?’ 직관적으로 스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어둡다 못해 까만 밤하늘이었다. 마코토가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달빛이에요.”

? 하지만.”

아주 작은 구멍들이 뚫려있거든요. 달이 동굴 바로 위 하늘에 뜰 때면 이렇게 반짝거려요.”

텐은 깨달았다. 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가느다란 공극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었다. 이렇게 은은하게 반짝일 수 있는 까닭은, 마침 구멍 위를 초승달이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초승달이 높이 뜨니까. 달이 조금만 더 밝았어도 금방 별이나 보석 같은 게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햇빛은 지나치게 밝아서 일직선으로 빛줄기를 만들곤 했다. 환한 낮에 이 동굴에 들어와 본 사람이라면 직사광선이 제단에 무수히 내리꽂히는 광경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가쿠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빛 근처로 희미하게 동굴 천장의 질감이 보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보석 같다." 옆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가쿠가 흘깃 류노스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홀렸구먼.' 아름답고 빛나는 것에 약한 언제나의 류노스케였다. 마코토 건너편의 텐도 눈치챘는지 설핏 웃고 말했다.

"초승달도 나쁘지 않네."

"난 꽤 좋아해. 차오를 일만 남은 달이니까."

가쿠의 말 뒤로 짧고 무사한 침묵이 이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부끄러운 소리를 한다고 놀렸을 텐도 가만히 긍정했다. TRIGGER의 삭과 무관한 마코토가 밝은 어조로 물었다.

"다카라지마가 왜 다카라지마(보물섬)인 줄 아세요?"

셋은 나란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코토의 말이 느리게 이어졌다.

"할머니가 말해줬는데요. 할머니도 태어나기 전 엄청 옛날에, 섬 밖에서 온 사람이 이 섬 동굴에는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대요."

"다이아몬드?"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멋대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나봐요. 바보 같아. 이 섬 어디에도 그런 건 없는데."

"애초에 일본 열도에선 다이아가 채굴되기 어렵지 않나?"

"그렇지."

"이 천장을 본 걸지도 몰라."

류노스케의 말에 나머지 셋은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마음은 찾고 있는 것을 봐 버리기 마련이니까.

"다이아몬드라. 다이아몬드 좋지."

"가쿠, 지금 데뷔곡 생각했지?"

"넌 아니야?"

가쿠의 반문에 텐은 대답 대신 느긋한 템포로 콧노래를 불렀다. 텐 솔로로 시작하는 첫 소절이었다. 가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바로 이어지는 자신의 파트를 휘파람으로 받았다. 즉흥적인 흐름에 ", 나도?"라며 당황하던 류가 얼결에 가사까지 붙여 노래를 불러버리는 통에 둘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다음 합창 파트를 소곤소곤 열창해주었다. 오늘 무대를 보러 왔던 마코토도 함께였다.

"다이아몬드 디스크도 생각나."

"대상 받았을 때 IDOLiSH7 애들이 엄청 멋진 패러디 축하 영상 찍어 줬지! 타마키 군 박력 있었어."

"근데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를 왜 그렇게 좋아해요?"

마코토의 물음에 TRIGGER가 각자 답을 내놓았다.

"예뻐서?"

"희귀해서 아닐까? 지하 깊은 곳에서, 높은 온도와 높은 압력을 견뎌야 만들어진대."

"지구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이라잖아. 깰 순 있어도 흠집은 안 난다던데."

가쿠의 말에 셋은 일제히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네사기가 말했었다. '사람들은 흠집 난 아이돌을 원하지 않는다'. 다이아몬드의 이름을 딴 데뷔곡도, 수상식 이름도 아이돌이 상처 입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니 어쩔 수 없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근데 다이아몬드로는 다이아몬드에 기스를 낼 수 있대요. 고모가 엄마 아빠 결혼반지 보여주면서 말한 적 있어요. 그래서 같이 넣어두면 안된다고."

"우리 가사 중에 '서로 부딪칠 때마다' 뭐 이런 거 있지 않았어?"

가쿠의 말에 두 사람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까 '퓨전'인가? 아무튼 처음부터 무결점의 보석은 우리랑 안 어울렸던 거야."

"월면에도 크레이터가 그렇게 많은데 저렇게 빛나잖아."

그들은 잠시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광경도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않았다면, 완전무결한 상태였다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반짝거리는 빛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어느새 초승달이 저만치 갈 정도로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침묵과 짤막한 대화들이 간간이 이어졌다.

"그거 들었어? 달의 뒷면에 있는 크레이터에 전파망원경을 설치할 거래."

"난 그런 거 좋아해. '상처를 영광으로' 같은 거."

"가쿠답네."

"오늘 그 말 두 번째거든?"

텐과 가쿠가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류노스케가 "!" 하고 주의를 줬다. 마코토가 유난히 말이 없다 했더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셋은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아침에도 생각했지만 여기서 잠들 수 있는 거 진짜 대단하지 않아?" 가쿠와 텐이 마코토를 조심스레 류노스케에게 업히는 동안에도 아이는 간간이 잠꼬대를 할 뿐 눈 한 번 뜨지 않았다.

"완전 어부바 담당이군."

", 다음에 나도 업어줘."

"좋아! 우리집은 마침 천장도 높으니까 목말은 어때?"

"농담이니까."

가쿠가 '텐은 농담을 알기 어렵게 한다'며 낄낄댔다. 텐은 류노스케가 자연스럽게 '우리집'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곱씹느라 반론할 타이밍을 놓쳤다. 마코토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대화를 이어가며 입구 근처에 당도했을 때, 밤바다에 흩뿌려진 달빛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보였다.

"입구에 보이는 거, 사람 아냐?"

가쿠가 발걸음을 늦추고 속닥거렸다. 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멋대로 들어왔다고 혼나려나?"

"그렇다고 안 나갈 순 없으니까. 가자."

세 명분의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림자가 그들을 돌아봤다. 해신제 가면을 쓰고 흰 옷을 걸친 여자였다. 그럴 리 없는데도 가쿠는 아침에 동굴 안에서 봤던 무언가를 떠올려 가볍게 몸을 떨었다. 맨 앞에 서 있던 텐이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멋대로 들어가서 죄송합니다."

"수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희는 바로 요 앞 <해원관>에 머물고 있거든요."

가쿠가 여관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변명했으나, 여자는 아무 말도 않고 류노스케의 등에 업힌 마코토를 빤히 바라봤다. 가면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의심받는 것일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류노스케는 괜히 마코토를 고쳐 업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아! 이 아이는 여관 주인 분 손자예요. 무사히 데려다줄 테니 걱정 마세요."

여자는 말이 없었다. 한참을 마코토의 얼굴을 살피면서 그에게 다가가지도 않았다.

", 괜찮으세요?"

가쿠의 물음에 여자는 드디어 마코토에게서 시선을 떼고 가쿠를 바라봤다. 차례대로 텐, 류노스케에게 시선을 준 그는, 묵례를 한 뒤 네 사람을 지나쳐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셋은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곳까지 걸은 뒤에야 가쿠가 입을 뗐다.

"유괴범으로 오해받은 줄 알고 긴장했지 뭐냐."

"나도! 의식 준비하러 오신 분인가 봐."

'이 밤중에? 빈 손으로?'

지금은 제사의 중간이었다. 맞아들인 것을 돌려보내기 전이라는 뜻이다. 제단 위에서 지나치게 쉽게 잠드는 마코토의 행동마저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텐은 이런 주제가 되면 미묘하게 신경줄이 굵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한 쪽은 모른 척 하는 것 같지만.' 가쿠의 미세하게 굳은 웃는 얼굴이 텐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가 봐."

텐이 자연스러운 어조로 대답하자, 그제야 가쿠의 표정이 좀 편안해졌다. 원체 자기기만과는 거리가 먼 남자이니 의심이 다 덜어지지는 않았겠지만, 신경쓰여서 잠을 설치는 것도 사양이었다. 텐은 동굴 쪽을 돌아봤다. 평범한 밤의 해변이었다.

 

 

 

DAY 3

 

 

전날 태풍으로 연기됐던 제사가 어둑새벽부터 치러졌다. 보내는 의식이었다. 바다 한가운데 짙게 깔렸던 해무가 육지로 기어 오는 동안, 아네사기와 TRIGGER, 츠루는 동굴 밖으로 나오는 가면의 행렬을 멀찍이 서서 바라봤다. 안개가 짙어질 때면 몇 미터 앞의 시야까지도 가렸기 때문에, 어제 본 가면 쓴 여자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제 이 섬 이름이 왜 다카라지마인지 알게 됐나요?"

츠루가 지나가듯 묻자 세 사람이 멋쩍게 웃었다. 마코토가 형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이미 아는 눈치였다. 누구도 훔쳐가지 못하게 세대를 거쳐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진짜 보석보다 소중한 걸지도 몰랐다.

류노스케는 어제 일을 생각하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는 망설이다 결국 말을 꺼냈다.

"마코토, 거기서 잠들었을 때 고모를 만났다고 했어요.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지만."

아네사기는 물론 가쿠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울면서 횡설수설하던 마코토를 달래며 들은 말이기 때문에 텐도 대강 알고 있는지 담담한 얼굴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다고. 그래서 무섭지 않았다고도요."

"뭐야. 왜 어제 말 안 했어."

그 말에 가쿠는 내심 아연했으면서도 여상한 낯빛으로 틱틱댔다. 류노스케는 곤란한 미소를 띠며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말해야 '네가 겁먹을까 봐 말 안 했다'라고 들리지 않을지 고심하는 것 같았다.

"가쿠는 그런 거에 쉽게 겁 안 먹는데, 어제 낮에 아저씨가 그 얘기 했을 때 유독 놀랐잖아. 그래서 뭔가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했어."

"그랬단 말이지."

"지금도 딱히 무서운 건어이, ! 무슨 뜻이야."

"별로."

"얘들아, --."

츠루가 작게 소리내 웃었다. 넷은 섬의 주민 앞에서 실례되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닌가 싶어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살폈다. 츠루는 불쾌하지 않다고 전하듯 입가의 엷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나도 여전히 동굴이 신기하지만, 이 땅에 초자연적인 뭔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작용하는 게 있다면, 믿는 힘이겠지요."

'믿는 힘'이라는 말에 류노스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들이 믿어서 생긴 존재가, 모두가 잊어버리면 사라진다는 이야기 같은 거 말이죠."

"아이돌과 팬의 관계와도 닮았군."

가쿠가 중얼거리자 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은 팬의 사랑으로 살아지는 존재이고, 그에는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가를 수 없는 믿음이 따른다. 사랑할 만한 존재라는 믿음, 즐거운 꿈에 대한 믿음, 눈을 돌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우리를 봐준다면, 우리는 춤추고 노래할 수 있어."

"있는 힘껏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어."

팬을, 소중한 사람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 그를 위해 무결하게 있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나버린 흠집을, 없었던 것처럼 덮고 싶지도 않다. 달의 크레이터를 전파망원경 부지로 탈바꿈하듯이, 흉진 자리를 새로운 굴절의 동기로 삼는 것. 그것이 믿음에 보답하는 올곧은 방식이라고 여겼다. 묶이고 축적되어 비로소 의미가 생겨난 마음을 솔직하게 대하고 싶었다.

 

육지를 거스른 해무가 걷히고, 하늘의 경계가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의식이 완전히 끝났는지 동굴로부터 나온 이들이 제각기 웅성대며 다섯이 있는 해안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한둘 씩 가면을 벗으며 맨얼굴로 츠루와 눈인사를 나눴다. 마을 사람들은 듬성듬성 서거나 주저앉아 해돋이를 기다렸다. 곧 횡으로 옅게 깔린 구름을 제치고 샛노란 햇무리가 돋았다. 태양 끄트머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강렬한 빛줄기가 수면을 건너 파도에 닿는 신발코를 적셨다. 텐이 입을 열었다.

"류, 전에 우리가 너의 보물이라고 했었지."

"하하…. 그랬지."

"류노스케….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래. 지금 이 순간도, 너희와 함께 여기서만 손에 넣을 수 있는 보물이야."

온전한 원이 드러나자 하늘이 부드러운 주황색에 휩싸였다. 피부를 덥히는 볕살이 이쪽을 건너다보는 저편의 시선처럼 느껴졌다. 동이 트기까지는 찰나에 불과했음에도 억겁의 터널을 지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늘진 자리 없는 TRIGGER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아네사기는 지금이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지금 기다리는 모든 승리를 종내 거머쥘 미래도 직감한다. 고요한 얼굴로 투지를 삼키고 폭풍을 부르는 이 아이들에게 있어, 그것은 TRIGGER의 탄생처럼 숙명적으로 예정된 일이었다. 아네사기는 웃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애들이라니깐.

 

 

@ViVAiiii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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